[고정애 특파원 혼돈의 그리스 가다] 메르켈 “그리스 국민투표 전엔 3차 구제금융 고려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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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I(오히).’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그리스 의회 앞에 있는 신타그마 광장을 채운 단어였다. ‘No(노)’를 의미했다. 5일 치러질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등 채권단 트로이카가 제시한 긴축안을 수용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30일 광장에서 울릴 단어는 ‘NAY(네·Yes)’일 것이다. 찬성 집회가 예정돼 있어서다.

 지난달 29일 광장엔 ‘유로(EURO) 뱅커들을 감옥에’ ‘긴축과 공포에 No’란 배너가 곳곳에 내걸렸다. 시민들의 가슴에서도 ‘OXI’ 스티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트로이카의 요구를 수용했던 지난 5년간 그리스는 더 나빠졌다.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 주장을 담은 종이를 나눠주던 하리스 시데리스(32)는 “25세 이하의 그리스 청년들은 주 40시간 일해도 한 달에 480유로(60만원)를 받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라며 “사람들을 위한 유럽연합이 아닌 보스들을 위한 유럽연합”이라고 했다. 54세의 실직자인 파나지오티스는 “내 아이들에게 존엄과 자유란 걸 남겨주고 싶다”고 했다. “이건 전쟁이다. (우리를 향한) 포위전에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등 유럽 정상들이 “긴축안에 반대하면 곧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그렉시트)를 의미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유로 대 드라크마(유로 전에 쓰던 그리스 통화)’ 표결로 묘사했다. 그리스인들이 그만큼 사태 진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인들이 렌치 총리의 발언을 협박으로 여겼다. 연금 생활자인 코스타스는 “(EU 집행위원장인 융커는) 우리에게 자살을 선택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실제론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만난 이들 사이에선 다른 의견도 적지 않았다. 아나자 발리아가(33)는 “유럽시민의 신분증을 갖고 유럽을 여행하는 유럽인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건설 노동자인 야니스 피아티디스(58)는 “협상이 곧 성사될 듯했는데 치프라스 총리가 갑자기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이 모든 게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영국 가디언은 이번 국민투표를 분노와 공포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리스인들이 EU에 대한 분노와 EU 탈퇴의 공포 사이에서 저울질할 것이란 의미다.

 일단 24~26일 여론조사에선 채권단의 방안에 찬성한다는 의견(47.2%)이 반대(33.0%)를 앞섰다. 하지만 시리자 정부가 반대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정부가 굴욕적인 타협을 협박받지 않도록 국민투표에서 반대를 선택해달라”고 호소했다. 통상 찬-반 대신 반대-찬성 순의 투표용지를 마련했을 정도다. 시민들도 “50대 50”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와 채권단의 막판 협상이 이어졌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날 오후 성명을 내고 “2년 동안 유럽안정화기구(ESM)가 그리스에 필요한 재정과 채무 재조정을 위해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기술적 디폴트’를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또 ESM 대표인 예룬 데이셀블룸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 의장에게 서한도 보냈다. 이번 구제금융 제안에선 신자유주의식 정책을 요구해 마찰을 빚었던 국제통화기금(IMF)을 배제했다. 또 금리 인하와 만기 연장 등 부채 구조조정과 사실상 제3차 부채탕감도 요구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를 채권단과 협상하기 위해 급거 벨기에 브뤼셀로 출발했다. 그리스 정가에선 “국민투표에 반대한다는 게 유로존 탈퇴가 아닌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란 주장을 뒷받침하는 행보”라고 해석했다.

 데이셀블룸 의장 등 유로 재무장관들은 이날 밤 전화 화상 회의를 통해 그리스의 제안을 수용할지 여부를 검토했다. 이와 관련,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본적으로 (채권단이 주장해왔듯이) 기존의 구제금융은 완료되는 것”이라며 “하지만 (그리스로선) 사실상 새 부채탕감을 요구한 것으로 영리한 제안”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독일 의회가 부채 탕감에 부정적인 게 여전히 변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의 제안 사실이 알려진 후 “그리스 국민투표 이전에 3차 구제금융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볼프강 쇼이빌레 독일 재무장관이 “이번 국민투표에서 긴축안이 부결되더라도 그리스가 유로존을 바로 탈퇴하는 건 아니다”란 얘기도 했다. 전날 메르켈 총리를 비롯, 주요 EU 지도자들이 사실상 ‘부결=유로존 탈퇴’라고 주장하던 것에서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다. IMF가 동의할지도 미지수다.

 이 같은 초읽기에 몰린 협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국의 가디언은 “막판 협상과 늦은 밤 회의에 중독된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그렉시트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고조되자 전 세계 언론인들이 아테네에 모여들고 있다. 이 때문에 신타그마 광장 주변 반경 2㎞ 이내 호텔 객실이 대부분 동났다.

아테네=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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