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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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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벌써 20년도 더 된 얘기다. 새벽에 술집 아가씨 여럿이 목숨을 잃은 화재 현장 취재를 갔다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시체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당시 같이 일했던 선배가 밥 먹는 자리에서 웃자고 그 시절 얘기를 꺼냈다. “사건 처리하던 경찰이 너를 술집 아가씨로 알아가지고….”

 정말 의아했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수습기자 시절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입고 모 기관에 취재 갔다가 신문사 보급소에서 나왔느냐는 얘기를 들었던 건 또렷이 기억한다. 황당했으니까. 하물며 취재 현장에서 경찰로부터 접대부로 오인받는 불쾌한 경험을 했다면 그걸 기억 못할 리가 없다. “에이, 무슨 그런 농담을.” 하지만 그 선배는 완강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사실 여부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더 이상 진도 나가지 않고 그쯤에서 멈췄다. 하지만 똑같은 사건, 심지어 나 자신과 관련한 기억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는 ‘기억’이라는 걸 확신하거나 과신하지 않는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말이다.

 어린 시절 TV에서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스릴러 영화 ‘가스등’(1944년)을 본 이후 진작부터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상속녀인 아내를 정신병자로 만들려는 남편이 집 안 물건을 하나씩 숨겨놓고는, 아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아내의 기억을 조작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기억에 얽힌 사연을 끄집어내는 건 최근 표절 시비에 휘말린 작가 신경숙이 한 신문 인터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봐도 (표절했다는 작품을) 안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다. …대조해 보는 순간 나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표절을 아예 부인하던 입장을 바꿔 표절을 시인하고 사과했는데도 이런 표현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거세지는 모양새다. 인터뷰 형식을 빌려 사실상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이런 언급을 한 게 과연 적절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하지만 들끓는 여론처럼 그가 말도 안 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정직하지 못한 변명, 즉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비난엔 섣불리 동의하지 못하겠다.

 몇 년 전 미 노스웨스턴대 연구팀은 ‘뇌가 과거 기억을 편집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뇌과학자인 김대식 KAIST 교수는 칼럼에서 이를 소개하며 “기억은 비디오테이프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아니다”며 “기억은 항상 업데이트되고 현재의 변화가 클수록 과거는 더 많이 편집된다”고 했다.

 누구는 이쯤에서 “신경숙을 옹호하려는 궤변이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거꾸로 기억이라는 게 이처럼 내 맘대로 온전하게 저장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가 처음부터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놨으면 좋았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엉뚱한 기억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