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病 앓던 중학소년 '맨땅 헤딩'끝에 꿈이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2000년 3월, 새 천년에의 기대로 '구대륙'의 한복판 독일도 술렁거렸다.

그러나 축구화 한켤레에 꿈을 싣고 열두 시간을 날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14세의 한국 소년 강한길(17.사진)의 가슴보다 더 뜨겁지는 못했으리라.

한길은 1986년 독일의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한길의 아버지 강학순(50)박사는 마인츠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안양대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선비'다. 다섯살 무렵 부모와 함께 귀국한 한길은 초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는 등 우등생으로 자랐다.

그런데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축구라는 병에 걸렸다. 6학년 때는 어느 중학교 코치의 눈에 띄어 부모 몰래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중학 1학년을 마칠 즈음 한길의 축구병이 깊어졌다.

외동아들이 "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하자 부모는 하늘이 노래졌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아무리 달래도 아들이 고집을 꺾지 않자 부모는 "공부와 축구를 병행할 수 있는 독일로 가자"는 힘든 선택을 해야 했다.

한길은 "축구가 재미없어지거나 선수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그만둔다"는 약속을 했고, 한길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를 탄 어머니(임영숙.45)는 조기 유학을 왔다는 심정이었다.

한길은 레버쿠젠 클럽을 거쳐 뒤셀도르프의 포투나 클럽에 입단했고, 여기서 카메룬 출신의 리하르트 토바 코치를 만났다. 토바는 빠르고 유연하며 영리한 한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토바 아래서 한길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2001년 레버쿠젠을 미텔라인선수권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미텔라인지방 꿈나무로 선정됐다. 2002년에는 포투나 소속으로 나이키컵 중부독일선수권에서 우승했다.

한길은 지금 청소년 리그인 레기오날리가에서 뛴다. 내년에는 최상급리그인 츠바이테리가(2부리그)나 분데스리가(1부리그)에도 진출할 수 있는 유망주로 부각되면서 현지 언론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린다.'라이니셰 포스트'는 신년특집호에서, '노이에 루흐 차이퉁'은 3월 7일자로 한길의 재능과 축구 철학, 입문 과정을 소개했다.

토바 코치는 라이니셰와의 인터뷰에서 "한길처럼 집념이 강하고 성장이 빠른 선수는 처음 본다"며 "3년 만에 프로를 바라볼 정도로 성장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한길은 노이에 루흐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축구는 나의 모든 것"이라는 말로 억센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부모는 고생이 심하다. 아버지는 안식년 휴가를 얻어 지난해 독일로 넘어간 후 매일 한길을 학교와 클럽으로 실어나르며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음악인인 어머니도 라디오 한번 틀어 볼 여유 없이 아들 돌보기에 바쁘다.

강박사의 마음은 아직도 오락가락한다. 솔직히 아들이 이제라도 축구를 접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다. 그래도 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사랑하는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고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허진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