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43) 지도자 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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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 야구를 총괄하는 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취임한 나는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시행했다.

우선 1979년 4월에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초등학교에 연식구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초.중.고교에 알루미늄 배트도 무상으로 지원했다. 이렇게 하자 각급 학교의 경비 지출이 줄어들어 야구 활성화의 밑거름이 됐다.

이어 5월에는 "80년 시즌부터 우수 지도자를 선발해 야구 선진국 미국에 지도자 연수를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지도자의 자질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재미 야구인 이덕준씨와 상의했다. 이덕준씨는 당장은 미국 대학에서 야구 지도자 연수가 가능하며, 점차 발전되면 마이너리그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 연수 계획 이외에도 각종 국제대회 때는 감독.코치 외에 2~3명의 감독을 기술연구원의 자격으로 대회에 합류하도록 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이고 국가대표 선수단 코칭스태프는 제한된 인원만 선발했기 때문에 국제대회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지도자가 적었다.

나는 최대한 많은 지도자가 선진 야구를 접하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술연구원에게는 꼭 그 대회를 통해 보고, 느끼고 배운 점들을 리포트로 제출하도록 했다.

지도자 연수 계획을 발표한 뒤 가장 먼저 연수를 희망한 지도자는 한일은행의 김응룡 감독이었다. 김감독은 사무실로 찾아와 "저를 보내주세요.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다.

나는 김감독의 희망대로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국가대표팀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내년(80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데 그때 국가대표 감독으로 뽑히지 않는다면 보내주겠다"고 단서를 달았다.

야구협회는 79년 호주에서 열린 국제대회 때 한을룡 한전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한감독과 동행했던 협회 임원들은 "아무래도 큰 대회에는 김응룡 감독이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김감독이 팀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과의 미묘한 감정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경기에 비해 일본에서 열리는 경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컸고, 협회로서도 부담이 됐다. 일본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그래서 80년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김응룡 감독을 설득해 미국 연수를 1년 미루고 대표팀 감독을 맡아주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한을룡 감독과 강병철 동아대 감독을 코치로 선임했다. 이들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일본을 꺾었고 쿠바에 이어 세계선수권 준우승이라는 개가를 올렸다.

김응룡 감독의 해외연수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그는 80년 시즌을 마치고 사무실로 찾아와 "이제는 약속대로 미국 연수를 보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협회로서도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결국 그는 81년 5월 9일 한일은행 감독을 사퇴한 뒤 야구협회의 주선으로 미국 조지아서던 대학에서 2년간 야구 연수를 했다. 국내 지도자로서는 최초의 해외 연수였다. 김감독은 이때 미국 연수를 가느라 정작 프로야구 출범 때는 초대 감독이 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실업야구 시즌을 모두 마친 10월 22일에는 통합 야구협회의 출범을 기념해 제1회 야구대제전을 개최했다. 야구대제전에는 대학.실업의 선수들이 각자 자신이 졸업한 고교 소속으로 출전했다.

전국에서 26개 팀이 참가했고 연일 만원 관중이 몰리는 대성황을 이뤘다. 결승에서는 전(全)경남고가 전(全)선린상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야구대제전의 성공은 훗날 프로야구가 지역연고로 출범하는 데 발판이 됐다.

그해 12월에는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 선수였던 백인천 현 롯데 감독과 야마우치 일본 롯데 감독, 요시다 전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초청해 제주도에서 2박3일간 지도자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는 국내 실업.대학 감독들 대부분이 참가했다. 현역 시절 강타자로 명성이 높았던 야마우치 감독과 유격수 수비의 일인자로 불렸던 요시다 감독은 국내 지도자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조언을 해주었고 국내 지도자들의 배움의 열기도 뜨거웠다. 오전 8시에 강의가 시작돼 1시까지 뜨거운 토론이 이어질 정도였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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