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고…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시뿐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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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종기구요, 아버지 전집이 나와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올해가 돌아가신 지 50년째 되는 핸데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 밟느라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고…. 이번에 전집 내주셔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많이 씻게 돼 기쁘고…”

시인 마종기(76)씨가 불쑥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인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66) 선생의 10권짜리 전집 완간과 자신의 열한 번째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 출간을 겸한 26일 낮 기자간담회. 질의응답에 앞서 소감을 짧게 말하는 순서에서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 얘기를 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에게 즉각적으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일까.

마씨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졌다.

“전에도 아버지의 동화책을 내자는 출판사는 여러 곳 있었다. 아버지가 수필도 많이 쓰셨기 때문에 같이 내려고 하다 보니 미뤄져 지금에서야 전집을 내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연찮게 가족들이 하나 둘 고국을 떠나 살게 되면서 아버지가 여러 번 오해를 받으셨다. 일제시대 때 징병 권유을 하셨다는 유언비어도 돌았다. 하여튼 굉장했다. 그런 오해를 차츰 풀어내는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마씨는 특히 “아버지가 한인을 무시하는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강한 분이셨다”고 했다. 개성에서 유학와 서울 보성고를 다닐 무렵 일본인 교사의 한국 학생 교육을 반대하다가 퇴학당했다고 했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강직함을 가진 분이었다는 얘기다.

역시 문학과지성사 출판사에서 나온 마해송 전집은 1∼7권은 동화, 8∼10권은 수필을 묶었다. 수필집을 편집한 소설가 원종국씨는 “마해송 선생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인 ‘바위나라와 아기별’을 쓴 동화작가로 대개 알려져 있지만 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집에서 수필가는 물론 종군기자로 전쟁 상황을 전했던 언론인, 출판사 편집자로서의 면모 등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 시인 마종기씨의 시적 좌표는 한국문단에서 독특하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군의관 생활 중 법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1965년 한·일 협정 반대 서명에 참가했다가 군의관 신분인 게 문제가 됐다. 분한 마음에 미국으로 건너간 게 1966년. 마씨는 미국에 건너간 지 4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소개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사람은 매일 죽어나가는데 정작 미국인 의사·간호사들과 영어는 잘 통하지 않고, 미국 올 때 편도항공권을 받아 귀국할 비행기 티켓을 구할 돈도 없었지만, 만약 장례식 참석을 위해 귀국한다면 미국에서의 의사 생활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 마씨는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시뿐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마씨의 시를 두고 평론가 이광호는 유랑자 의식, 표랑의 삶에 대한 회고가 두드러진다고 표현한 바 있다. 특히 모국어라는 존재의 젖줄이 끊어진 이국 공간, 생명의 온기가 허망하게 스러지곤 하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라는 이중의 어려움 속에서 그의 시어가 피어난다는 평가다.

마씨는 “아버지 전집의 모든 저작권과 인세 수입을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 넘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지에서 기왕에 마해송 문학상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 모르는 내 아이가 나중에 할아버지가 한국어로 쓴 작품에서 나오는 인세를 받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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