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외국차 비켜라" 간척지의 밤은 뜨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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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현대.기아자동차의 남양종합기술연구소(사진).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의 간척지 1백5만평에 들어선 동양 최대 규모의 자동차 종합연구소다.

자동차 개발 전초기지답게 자동차 개발과 관련한 최첨단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 1986년 12월 주행시험장과 연구시설이 들어서면서 자동차 개발의 첫발을 내디뎠다.

93년엔 총연장 60km에 이르는 시험로와 70가지의 다양한 노면을 갖춘 종합주행시험장을 갖췄다. 열악한 기후에도 자동차가 안전한지를 검사하는 첨단 풍동시험장에 이어 2002년 파이롯트 시험제작소가 자리를 잡으면서 세계적 수준의 자동차 연구센터의 면모를 갖췄다.

이를 위해 회사가 지금까지 투자한 돈은 8천2백억원에 이른다. 이곳에는 1천4백여명(박사 1백75명)의 연구인력을 포함해 5천3백70명의 임직원이 자동차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요즘 기업 연구소가 비상이다. 대학에서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쓸 만한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 만큼 경제성장을 이룬 데에는 뭐니 뭐니해도 엔지니어들의 힘이 컸다.

한국자동차 기술의 메카인 현대.기아자동차의 경기도 남양종합기술연구소. 이곳에선 묵묵히 산업 현장을 지키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기술연구원들이 적지 않았다.

24시간 기업연구소의 불을 밝히고 '기술보국(技術報國)'을 실천하는 엔지니어들을 만났다. 파워트레인 연구소의 김만영.최의철 연구원은 차량에 얹을 각종 엔진의 성능 시험을 맡고 있다.

디자인 연구소의 이병섭.박영진 연구원은 새로 나올 승용차의 디자인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 책임자들이다.

파워트레인硏 최의철·김만영 연구원

'자동차의 심장' 엔진의 産室 "외국에 로열티 받고 수출 뿌듯"

-왜 연구원이 되었나.

▶최의철=어릴 적 희망이 과학자였다. 만화영화 마징거 Z를 보고 자란 386세대다. 로봇을 만들어 지구를 구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자연스럽게 공학에 흥미를 느꼈다. 결국 마징거 Z와 흡사한 연구대상을 찾으며 진로를 모색하다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김만영=조그만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공학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공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대학 진학 당시에 법학이나 의학이 인기를 끌었지만 그 분야는 결국 서비스 업종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겼다.

-하루 일과를 소개한다면.

▶최=오전 5시40분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한다. 30분 만에 세면과 식사를 끝내고 6시25분에 출근 버스를 탄다. 회사에 도착하면 7시15분.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10여분간 아침묵상을 하며 일과를 다듬는다.

업무는 8시부터 시작한다. 이때부터 밤새 쉼없이 돌아간 엔진에는 문제가 없는지, 점검해야할 사항은 무엇인지를 꼼꼼히 챙긴다.

이후 엔진시험에 매달려 그 시험결과를 검토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지나간다. 업무는 되도록 오후 7시30분까지 마치려고 노력하지만 10시를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매주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어서 오후 5시에 일찍 퇴근한다.

-고충도 많을텐데.

▶김=연구원 생활을 하다보니 늦은 밤이 돼야 정신이 맑아진다. 올빼미가 다 됐다. 그 때문에 회사에서 하던 일을 집에까지 들고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집문을 열고 들어서면 함께 시간을 보내주길 기대하는 처자식을 볼 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주중에 못다한 일을 마무리 짓느라 가정생활에 소홀한 편이다. 가장으로선 빵점이다.

-연구원으로서 느끼는 보람은.

▶최=개발한 엔진이 대량생산될 때 마치 건강하고 튼튼한 아기를 낳은 산모와 같은 심정이다. 특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선진기술 장벽을 뚫을 때 느끼는 희열은 연구원이 아니면 못 느낄 것이다.

최근 국내 기술력으로 개발한 엔진을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가 사가겠다며 로열티를 낼 때 뿌듯함을 느꼈다.

-친지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김=아내와 친구들은 내가 연구원 체질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칭찬 같은 핀잔을 준다. 틈만 나면 자료나 책을 들춰보기 때문에 아내는 가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늘 불평한다.

하지만 디젤 엔진 분야에서 확실한 전문가가 되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모습이 안쓰러운지 이제는 아내도 많이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편이다.

-연구직을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최=연구직을 기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현혹돼선 안된다. 연구직종에는 세계 최고가 되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일단 연구직을 하겠다는 뜻을 정했으면 선배들의 조언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디자인硏 이병섭.박영진 연구원

그려보고…진흙으로 만들어보고 "예술과 엔지니어링 접목 중요"

-디자이너가 된 계기는

▶이병섭=어릴때 자동차 장난감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자동차 만드는 것을 배우겠다며 공업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부모님이 이공계 진학을 반대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다. 어릴 적 꿈을 이룬 것이다.

▶박영진= 청소년 시절 이탈리아산 빨간 색 자동차를 보고 그 차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막연하게마나 나도 멋진 스포츠카를 만들어 그 차를 운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오며 기억에 남는 일은.

▶박=10년전 외국의 멋진 자동차가 보고 싶어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떠났다. 이탈리아의 한 자동차 박물관에서 세계의 명차들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 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8년전 새 모델 디자인을 개발하던때이다.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진흙으로 모델카를 만들다가 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차림으로 달콤한 단잠을 잤다. 연구원 생활이 다 빡빡한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로서 힘들었던 순간은

▶박=가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슬럼프에 빠진다. 이때 자신을 추스리는 일이 쉽지 않다. 얼핏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연필을 잡고 스케치를 한다.

그러나 머리 속이 마치 백지처럼 아득해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일손이 안 잡힌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모델차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은 여지 없이 깨지게 마련이다.

▶이=디자인 개발은 생명탄생의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열정을 갖고 일에 몰두해야 감이 온다. 작품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 출수 없다는 점이 힘들다.

-자동차 디자이너의 중요한 자질은.

▶박=예술가의 안목를 갖고 이를 엔지니어링과 결합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설계와 제조, 마케팅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활발히 접촉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상용화가 안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고집스럽게 디자인에만 매달리면 숲을 보지 못한다.

-다시 직업을 택한다면

▶이=어려서부터 꿈이 자동차 디자이너 였다. 또 선배 등을 통해 디자이너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입사했기때문에 직업에 대한 후회는 없다. 현재 어느 선진국 못지 않게 내 역량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디자인 환경이 갖춰져 있어 만족한다.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한마디.

▶이=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 겠지만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일찍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자동차 디자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연구에 힘쓸 각오를 해야 한다.

화성=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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