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전문 경영인-부산파이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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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직은 창업세대가 주류인 우리재계에 가장 익숙한 경영 체제는 역시 창업주의 친정체체다.
선대의 후광을 입은 창업 2세들은 여전히 창업주의 그늘에서 조심스런 경영 수련을 쌓고 있고 창업주들은 회장 또는 명예 회장의 직함을 가진 채 경영상의 주요한 맥을 일일이 짚고 있는 것이 관례다.
이런 뜻에서 창업주 스스로가 일찌기 모기엄의 「고문」 직으로 한 걸음 물러앉고 30대 중반의 2세에게 경영대권을 물려준 후에도 여전히 탄탄한 경영을 꾸려가고 있는 부산파이프그룹은 기업의 과감한 승계가 성공한 전례를 남긴 선구적인 기업이다.
부산파이프의 창업주 이종덕 고문(69)은 지난 79년 스스로 회장직에서 고문직으로 물러나며 관계사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뜻을 밝혔다.
『부자가 함께 임원직에 앉았으면 우선 밑에 사람들이 일하기 힘들어 안된다』
물론 이 고문은 요즘도 가끔 공장 등을 직접 둘러본 후 사장실에 들러 불호령을 내릴 때가 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밝힌 대로 어디까지나 경영의 표면에 나서지 않는 「고문」으로서의 충고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창업주로서의 경영권 행사가 아니다.
강관을 중심으로 성장, 요즘 드물게 보는 「탄탄한 기업」으로 금융가에 정평이 나 있는 부산파이프의 초석은 해방 직후에 놓아졌다.
해방 전 금고 제조공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종덕 고문은 해방 직후 친형 이윤우씨 (작고·전 메트로호텔 회장)와 함께 철강재 판매상인 해동공업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6·25가 터지고 부산으로 피란한 형제는 피란지에서 그간 모았던 재산을 나누어 분가, 동생인 이종덕씨는 서울서 하던 사업을 이어 국제시장안에 해덕철강상사를 열었다.
이후 꾸준히 산업자본을 축적해 지난 60년 부산철광공업 주식회사 (현 부산파이프)를 설립하면서 비로소 강관제조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계열기업 전체의 연간 외형 약 1천 5백억원의 90% (약 1천 3백억원)를 후발 부산파이프가 차지할 정도로 제조업의 비중이 커져 산업자본의 면모를 갖췄다.
또한 부산파이프의 계열기업은 서울지역 판매를 전담하는 부산강관, 부산지역 판매 담당의 해덕철강, 자사 생산제품의 수송을 위한 해덕통운, 동도금강관생산의 부산번디 등 모두 모기업의 생산·수송 판매를 위한 수직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
창업주 이종덕 고문은 지난 7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장남인 이운형 현사장(37)에게 실질적인 경영대권을 물려줬지만 당시 이창우 부산파이프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 갑작스런 승계로 생길지도 모를 공백에 대비하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창업주 가계의 먼 친척벌이 되는 이창우 회장(65)은 육본인사 참모부장 출신의 인사통으로 예편 후 대한중석 전무를 거쳐 지난77년 부산파이프 사장으로 영입 됐다.
이창우씨의 회장 취임과 함께 부산파이프·부산번디·해덕전기 대표이사 사장을 겸임하면서 실질적인 최고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운형 사장은 서울대 공대, 미 미시건대를 거쳐 지난 74년부터 경영 수련을 쌓았다.
30대 중반에 1천억원 규모의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의 기반을 더욱 굳게 다진 이 사장은 매우 신중하며 겸손한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창업주의 2세로는 이사장 외에 2남 이순형씨(35)가 현재 해덕철강 사장으로 있으면서 관계기업 경영에도 폭넓게 관여하고 있다.
부산강관 김영철 사장과 해덕통운 한국렬 사장, 해덕강업 이원구 사장은 모두 60년대 중반과 70년대 초에 입사, 관계사의 중역을 거쳐 경영책임을 맡게 된 토박이 경영인들이다.
2세로의 과감한 승계가 일찌기 이루어졌던 부산파이프는 지난해부터 주종인 강관제조· 판매 이외의 사업으로선 처음으로 전기제어장치·모터제조 등의 전기 업종에 진출, 본격적인 2세대 경영 시대를 열었다.
강관 위주의 경영에 한계를 느껴 전기업종 진출을 결심한 이운형 사장의 경영 수완에 의해 부산파이프의 「기업 변신」이 시작된 셈이다.
【특별 취재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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