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쇼크와 한미무역마찰|대미 교역은 흑자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작년12월 미국 상무성의「올머」차관은 자기네나라 수출입은행 총재 앞으로 한 장의 공한을 보냈다. 내용인즉『한국의 광양만 제2제철 건설에 미국수출입은행이 돈을 대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의 대미철강수출이 골치를 썩이고 있는 판인데 돈까지 대줘가며 더 많은 철강을 생산하게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는 지적이었다.
최근의 한미경제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주한 미 대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강경한 어조로「경고」해 왔다. 자국상품 수입규제 완화와 한국상품의 덤핑수출을 시정하라는 것이다.
기업들은 기업들 나름대로 지한 파·전직 고위관리 등을 로비이스트로 앞세워 파상공세를 펴왔다.
그동안의 누적된 불만과 요구사항들은 금년 초의「레이건」대통령방한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강도 또한 한층 높여 왔다.
이들이 들고 나온 첫 번째 시빗거리는 미국이 한국물건을 더 많이 사가는 데 왜 한국은 미국 물건수입을 막느냐는 것이다. 한미교역관계가 자기네 측의 일방적인 역조이니 이것을 시정해야겠다는 이야기다.
구체적인 카드로 컴퓨터를 비롯한 대폭적인 수입자유화를 요구해왔고 원전11·12호기, 통신방송 시설, 지하철 건설 등의 주요 프로젝트의 적극참여, 은행· 보험업의 업무영역 확대 등을 요구해왔다.
한편으로는 컬러 TV·철강 등의 한국수출상품에 대한덤핑판정과 일반특혜관세(GSP) 적용의 연장문제 등을 또 다른 카드로 내놓고 있었다. 당기고 미는 양동작전이었다.
이 같은 급진적인 미국 측의 태도변화에 업계는 물론 정부당국 역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이에 대한 성의표시로 31개 품목에 대한. 관세을 인하조치가 취해졌고 구매사절단을 긴급 파견, 항공기2대를 포함해 모두 30억 달러 어치를 구매계약하기에 이르렀다. 주요관심사였던 국내 외국은행지점에 대한 재할도 터줬다.
이의 대가로 얻어낸 것의 하나가 컬러TV덤핑판정에 대한 상무성의 조기재심이었고 그것이 지금의 쇼크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미교역관계에 있어 우리측의 대미 수출이 최근 들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최근2∼3년 동안은 매년 30∼40%의 높은 신장률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만년적자를 면치 못하던 대미무역수지는 82년부터 흑자로 돌아서 83년에는 18억5천만 달러의 혹자를 기록했다.『이것보라』는 것이 미국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점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비록 상품교역은 최근 들어 우리측의 흑자로 뒤바뀌었다해도 무역외수지는 아직도 상당한 적자를 계속하고있다. 예컨대 한국에 나와 벌어 가는 미국기업의 부실송금· 이자수입· 운임·여행수익 등의 역외수지적자는 해마다 10억 달러 이상을 기록해 왔다.
더우기 해외건설업체들이 현지에서 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건설중장비들은 지금까지의 계산에서 빠져있다.
이것들만 해도 최근 2년 사이에 15억∼16억달러수준. 따라서 실질적인 한미양국의 교역관계를 따져보면 82년에는30억 달러, 83년에는 5억 달러씩 우리측의 적자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 측의 대한역조라는 주장은 대국답지 않은 엄살에 불과한 셈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 같은 숫자의 시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미국 내에서 팽배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의 대세와 그 속에서도 특히 한국경제에 대한 경계심이 부쩍 고조되고 있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폴·새뮤얼슨」교수도 연전의 본사기고를 통해『한국경제가 가장 유력해야 할 점은 국제무역시장에서 제2의 일본이라는 인삼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미 한국을 제2의 일본으로 간주하려는 징후는 여러 군데서 찾아진다.
연간 40억 달러의 대미무역흑자를 내면서도 아무소리 없는 대만의 경우와는 좋은 대조다.
GSP졸업은 이미 시간문제로 기정사실화 되었고 우리측에 대한 수입개방요구는 갈수록 거칠다. 외교차원에서 비록 호혜적인 처우를 생각한다해도 국내법과 실무관리, 그리고 업계의 강력한 로비가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다.『장관은 OK, 실무자는 부가』하는 식이다.
상업베이스가 우선인 나라다. 재작년 쌀 풍년으로 보관창고가 모자라 야단인데도 미국 농무장관이 방한, 자국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사줄 것을 우리 농수산부장관에게 강력히 요구한 사실도 있다. 미국농산물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사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할 만큼 했다」는 것이 우리측 실무당국자들의 이야기다. 상당한 비판을 무릅쓰고 수입자유화일정을 대폭 앞당겼으며 외자도입법도 고쳐 외국기업진출의 길도 한결 넓혀 놓았다. 그러나 한번에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요구하는 그들로서는 성에 찰리 없다.
외국은행지점들은 수출금융의 취급과 부동산소유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컴퓨터 등의 첨단기술제품과 농산물의 수입자유화, 대형프로젝트의 참여 등을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내놓을 또 하나의 카드는 이달 안에 있을 철강수입의 쿼터배정축소계획이다.
그 결과에 따라 자칫하면 철강의 대미수출은 아예 포기해야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놓을 카드는 마땅한 게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장규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