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프라하까지|인생유전 34년…이기순여사 수기<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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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경중앙미술학원에서 보낸 5년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내 가슴에 아름답게 남아있다.
사랑하는 남편 「야로슬라브」를 만나기도 했으려니와 그토록 키워왔던 화가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튼튼한 터를 잡아준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려운 한때를 겪었던 이국의 가련한 여성을 친형제처럼 돌보아주었던 중국친구들, 어버이처럼 아껴주었던 스승들을 나는 더욱 잊을 수 없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아직 다시 가보지는 못했으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찾아보고 싶은 심정, 어디다 비하랴.
중국의 「피카소」로 불렸던 제백석 선생님, 중국화의 대가이신 인포석 선생님, 그리고 이가염, 황영옥 선생님, 지금도 그분들의 따뜻한 손길이 내 예술을 지탱해 주고있다.
내 예술 지탱 해줘
유화와 중국화를 함께 하셨던 제백석 선생님은 내가 중앙미술학원에 다닐 때 그 학교교장선생님이었다.
나는 유화에 전념하면서도 교장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중국화에도 손을 댔다. 체코에 돌아가 살았던 그 동안에도 틈틈이 묵화를 그리며 즐거웠던 그때를 회상하곤 했다.
제백석 선생님이 살아있다면 지금 아흔을 넘었을 터이다. 문화혁명 때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지금은 타계했을지도 모른다.
제백석 선생님도 중국화단에서 손꼽히는 대가였지만 인포석 선생님은 그분보다도 훨씬 더 이름이 알려져 있는 분이다. 인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런던의 그림경매장에 가끔 인 선생님의 작품이 나오는데 정확한 값은 잊어버렸지만 세계적인 서양화가들의 작품이상으로 고가로 팔리고있다.
간혹 런던전시회 일로 영국에 갔다가 인 선생님의 작품을 대할 때가 있는데 나는 그때마다 부모님을 그리듯 인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을 더듬곤 했다.
이선생님이나 황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나뿐 아니라 남편 「야로슬라브」 도 이분들에게 중국화를 배웠으며 다정한 친구처럼 지냈었다.
「야로슬라브」 는 요즘도 중국화를 열심히 그리고 있으며『중국화를 그리다보니 중국을 사랑하게 됐고 중국을 사랑하니 중국화를 그릴 수밖에 없다』 고 말하곤 한다. 남편의 주 전공은 판화지만 그의 중국화도 수준 급이다.
북경중앙미술학원에 다니는 동안 나는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릴 기회가 있었다. 이른바 「체험생활」 을 통한 작품제작이다.
연2회 지방파견
미술학원학생들은 1년에 한차례 또는 두 차례씩 전국의 공장이나 농촌에 파견돼 「체험생활」을 하게돼 있다. 기간은 대개 2개월 정도였다.
공장에 파견돼서는 공장노동자들과 함께 작업도하고 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제작한다. 노동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힌 뒤 이 같은 체험을 작품의 주제로 해 그림을 그렸다.
농촌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농민들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그들의 순박한 품성과 희생적인 노력을 몸소 깨우치고 그들의 땀흘리는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나의 중국여행은 대체로 「체험생활」 을 의한 여행이었으나 「야로슬라브」 는 나보다 더 많은 곳을 섭렵했다.
그는 소주 항주 남경 광동 등 안 가본데 없이 다니며 작품소재를 찾았다. 원래 프라하에서 공예대학을 나온 그는 세계적으로 첫손가락을 꼽는 중국도자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야로슬라브」 는 판화와 중국화 공부를 주로 했으나 중국에 머무는 동안 중국도자기를 눈 여겨 관찰,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로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됐다.
북 체코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 도자기작품을 위한 작업실을 따로 차린 것도 도자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말해준다.
순수한 예술을 지향하는 「야로슬라브」 는 쇼비니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에서의 쇼비니즘을 그는 싫어하고 있다.
그가 서양인으로서 중국적인 것을 사랑하고, 중국미술을 열심히 익히고, 자신의 예술에 중국적인 것을 서슴지 않고 도입하고 있는 것도 그의 이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납의 것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것을 소홀히 하고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예술이 중국적인 요소를 상당히 갖추고있지만 바탕은 어디까지나 체코적 인 것 체코인의 정신으로 깔려있다.
지난번 런던에서 있었던 한국미술5천년전을 우리 부부가 함께 본 일이 있다.
나의 모국인 한국의 전통문화예술에 관해선 나의 설명뿐 아니라 각종 문헌을 통해 익히 알고있었던「야로슬라브」였지만 그가 한국미술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시회에서 였다.
그는 전시장안의 금은세공예술품, 고려청자, 이조백자, 각종서화를 넋을 잃고 들여다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한국미술이 세계적인 수준이란 것도 그는 인정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이 같은 문화유산을 얼마나 깊게 인식하고 있는가 고 내게 묻기도 했다.
그것은 요즘 한국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이 같은 문화적 향기를 맡아내기 어렵다는 말로 들린다.
한국작가의 작품 속에서 한국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너무 서양적인 게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남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것으로 가득 차 있어야 그의 작품세계가 더욱 빛나리라는 게 남편의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야로슬라브」가 나에 대한 가르침으로 한 말들이다. 아직 한국의 요즘 작품들을 속속들이 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이상 섣부른 견해를 말하긴 이르다.
그는 또 이런 발을 한 적도 있다.
한국미술에 감탄
일본사람들은 자신들의 것이면 무엇이고 남에게 보이고 자랑하려 드는 것 같은데 한국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본문화예술의 수준이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심하게 말해서 자신들의 문화예술을 세계각국에 선보이는데 염치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열성적으로 선전을 하다보니 세계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예술을 친근하게 여기게 되고 또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이라는 것이야말로 중국과 한국이 그 원류가 아닌가.
한국사람들이 저들보다 못지 않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화민족으로서의 성가를 세계 속에 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너무 체면을 찾는 때문이 아닌가 그는 말하기도 했다.
이제 간접적으로만 듣고 보아왔던 한국의 문화예술을 그가 직접 확인할 좋은 기회를 갖게됐다. 우리부부는 한국에 머무는 석 달 동안 될수록 많은 시간을 한국의 문화예술과 가까이 하는데 보낼 작정이다.
모쪼록 이번의 한국방문이 그에게 있어 한국의 문화예술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은 내가 한국여성인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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