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8) - 30년대의 문화계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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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문에서는 호외를 몇번씩 내고 큰 전쟁이 일어난다고 술렁거렸다. 중국군대는 별로 항전다운 항전을 안하는데,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자꾸 확대시켜 나갔다.
19일에는 조선군이 중앙정부의 허가도 없이 신의주 국경을 넘어 만주에 들어간 소위 월경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동군이 중앙정부의 말을 안듣고 제마음대로 전쟁을 확대시켜 나가므로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하였다. 이에따라 국제연맹에서는 일본 정부에 조속한 시일안에 철병하도록 권고하였지만 당사자인 관동군은 코방귀를 뀌면서 전쟁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관동군 참모인 우원완인데, 그는 뒤에 동아연맹을 제창하였다.
그때 경성제국대학 안에는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합작해 조직한 반제동맹이란 비밀결사가 있었다. 이 성대반제동맹에서 만주사변을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이라고 하여 즉시 철병하라는 격렬한 반전 격문을 서울시내 몇군데에 뿌린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통치의 중추인물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제국대학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포섭되어 조선독립을 부르짖는 공동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준 획기걱인 사건이었다. 그러면 반제동맹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해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한테 포섭되어 이 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는지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때 대학 예과에서 시위운동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하였고, 그때 주동인물이 문과 1학년 학생이던 신현중과 이과 2학년생이던 서규찬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신은 이 일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열심히 동지를 구했는데, 같은 반에서 고정옥· 최상규ㆍ 최기성등이 동조해 았지만, 뜻밖에도 일본인 학생 시천조수ㆍ 앵정삼량·평야이길등 3명이 이에 동조해 왔다.
특히 시천은 용산중학을 나왔는데, 조선말을 썩 잘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거침없이 말하였다. 그는 지하운동을 하면서도 언제 공부를 하는지 성격은 항상 1등이었다.
신은 진주가 고향인데, 경성제일고보때 나보다 2년 아래였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나보다 2년 후배였다. 그는 이 사건이 끝난 뒤에 징역 3년을 치르고 나와 선일보 기자를 하였고 해방후에는 진주여고·통영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수필집 『두메집』 『논어 국역』 등의 저서가 있는데, 사람은 호인형이었고 학생때 부모는 도장관이 되기를 바랐는데, 반대로 징역을 살아 불효가 막심했다고 술좌석에서 웃으며 이야기했다. 몇해 전에 별세하였다.
그래서 신은 이들과 모의를 거듭하고 반제동맹에 가맹할 것을 결의하였다.
반제동맹은 1927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전세계 30여개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세계각처의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피압박 민족의 전선통일·민족자치 계급타파의 실현등을 목적으로 창립된 국제기구였다. 신등 31년 봄 이 동맹에 가입하고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반제동맹의 한국지부를 설립하였다.
신은 이에 앞서 의학부의 예규찬과 자주 만나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신은 대학 안에서만이 아니라 학외에서도 점차로 조직을 넓혀가 같은 하숙에 있는 제2고보학생 박승민과 조선총독부 사동 이형원, 조선일보 사동 안복산까지 포섭하였다. 그리고 「독서회 뉴스」 라는 팸플리트를 자주 만들어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원고는 여러사람이 썼고 등사판 인쇄는 일본인 학생 앵정의 하숙방에서 시천과 앵정 둘이서 밤을 새워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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