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전방위 예술가 8명 영·상·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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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화 판에서 전방위로 뛰는 예술가 8명이 8가지 스타일로 희한한 영화 하나를 내놨다. 스타일로 따지자면 빼놓을 수 없는 '물건'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뛰어나왔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성기완, 설치미술가 김홍석, 음악가이자 영화배우인 '고구마' 권병준, 영화연출가 김성호, 미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임승률, 사진가 김지양, 패션 디자이너 서상영, 미학자 최빛나씨가 뭉쳤다. 배후 세력이라 부를 만한 면면도 만만치 않다. 설치미술가 최정화, 이미지 비평가 이영준씨 등이 시치미 뚝 떼고 배우로 변신한다. 이제 뭘 하고 살지 감이 온 사람들 같다.

① ‘베리 코리안 콤푸렉스’를 만든 감독들. 왼쪽 아래 안경 쓴 이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홍석·임승률·김성호·김지양·서상영·성기완씨.
②김홍석 감독의 ‘와일드 코리아’에서 배우 뺨치는 연기를 선보인 이미지비평가 이영준씨.
③성기완 감독의 ‘즐거운 나의 집/후진’에는 다양한 작업이 이뤄지는 ‘후진’ 화장실 장면이 나온다.

영화 제목 '베리 코리안 콤푸렉스(very korean complex)'는 뜻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몹시 한국적인 콤플렉스'라니. 혹시 청계천 어디쯤에서 소매 잡아끄는 그 소리 "죽이는 거 있어요"를 기대할 수도 있을까. 현실에 더 '죽이는' 영화가 매일 새 판본을 내놓는 상황에서, 8명 감독은 위험을 감수하며 한국형 콤플렉스의 크기를 늘린다. 있는 그대로 찍었다는 말이 서늘하다. 8편의 내용은 이렇다.

■ 즐거운 나의 집/후진='쇼핑 갔다 오십니까?'의 시인이자 음악그룹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로 활동하는 성기완 감독은 말의 여러 국면을 후줄근하게 다뤘다. 자동차 후진할 때 경적처럼 흘러나오는 '즐거운 나의 집'이 꼬투리다. 후진 곳, 화장실, 후진국, 뒤쪽으로 나아가면 엄마 자궁, 혼자 아기 낳는 여고생, 그 아기를 키우려는 남자 동성애 커플…. 그의 시 '검은 구멍은 그다지 검지 않다'의 한 구절처럼 "오 나의 어머니/ 지금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 오! 마이 갓=그의 이름은 최만복. 직업은 예수다. 차가 있지만 걸어다니고 갈증으로 목이 타지만 음료수 하나 사먹지 못한다. 헐벗고 주린 자 때문에. 임승률 감독은 냉랭한 여성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내레이션에 주도권을 넘긴다. 내레이션은 영화 속 내용과 화면을 바라보는 구경꾼 사이에 감독이 걸쳐놓은 출렁다리다.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기울어지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

■ 영화 찍으러 가요='고구마' 권병준 감독은 고구마처럼 말한다. "영화 찍기가 유행인 거 같아 콤플렉스 해소 차원에서 영화 찍는 모습을 찍어 보았습니다. 나를 삶아 드세요." 뻑뻑한 세상을 삶은 고구마처럼 물렁하게 만들고 싶다는 만년 소년의 이상한 사랑 영화.

■ 젊음과 죽음=사진가 김지양 감독은 검은 바다를 보여준다. 기웃거리다 보면 뭐가 나올 듯 서성이게 하지만 잠시 동안 하늘과 구별되지 않는 바다가 나오고, 허무하다. 교훈은 없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실제의 현실과 차이가 있다.

■ 포스트(POST)=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지존으로 등극한 인터넷 환경에 대한 소극. 패션 디자이너 서상영 감독은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으로 인터넷을 꼽는다.

■ 맛과 멋=조숙한 미학자 최빛나 감독은 "이 나이가 되니 감각적인 게 좋아"를 외치는 중년의 미술평론가 '영준 리'를 대리자로 내세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극장전' 틀을 빌렸지만 더 건조하고 잔인하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맛과 멋이 아닌지"라고 눙친다.

■ 와일드 코리아=도발적인 상황설정이 그의 설치미술이 꼭 그러한 김홍석 감독답다. 1997년 대한민국에서 한때 일반인에게 총기를 한 정씩 나눠주고 자유 사용을 허용했다는 허구는 우스움과 심각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다 쏴죽이고 싶은 때가 당신은 없으셨는지. 얼굴색이 빨갛다는 이유만으로 매장되던 그때 혹은 지금 그 시절을 아시는지.

■ 리사이클드 포에버=이리하여 영화 막판에 감독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다. 김성호 감독은 제 작품의 콤플렉스를 풀어놓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로 마이크를 넘긴다. 괴롭고 지쳐 있고 여전히 불쌍한 우리지만 약속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제작 기획을 맡은 김홍석씨는 "관객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영화, 그러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상력 가득한 대화법"이라고 이 영화를 풀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형식이 내용을 만들어가는 영화, 미술전시로 보자면 그룹전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해석하다 보면 전혀 상관없을 듯 보이는 8개의 작은 영화가 둥근 고리를 이루며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 틈새를 메워주는 비밀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갈고 닦아온 고수끼리의 협업이다.

27일 단 한 번뿐인 시사회를 연 '베리 코리안 콤푸렉스'는 내년 1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 광화문 아트 큐브에서 하루 세 번씩 볼 수 있다. 최정화 가슴시각개발연구소장의 주장처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는' 영화가 개봉박두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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