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blog] 거인들, 힘·스피드로 격투기판 점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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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발루예프(오른쪽)가 지난 18일 열린 WBA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존 루이스에게 펀치를 날리고있다. [베를린 로이터=연합뉴스]

거인 복싱 챔피언이 탄생해 화제입니다. 키 2m13cm에 147㎏의 니콜라이 발루예프(32.러시아)가 18일(한국시간) 미국의 존 루이스를 2-0 판정으로 누르고 세계복싱협회(WBA) 새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물론 복싱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무거운' 챔피언이죠.

그동안 복싱계에서는 거인이 좋은 성적을 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몸놀림이 무뎌 스피드가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긴 리치도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발루예프는 자신보다 25cm나 작고 45㎏ 덜 나가는 루이스에게 철저한 아웃복싱을 구사했습니다. 이전 거인들과 달랐던 점은 스피드가 뒷받침됐다는 것이죠. 43승(31KO) 무패의 발루예프는 야구와 원반던지기 선수를 거치며 스피드와 순발력을 장착했습니다. '거인이 복싱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통념을 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고요.

발루예프의 챔피언 등극에 따라 '거인국 출신'들이 격투기 종목을 하나씩 잠식하는 느낌입니다. 지난달 이종격투기 K-1 월드 그랑프리 파이널 도쿄 대회에서 우승한 세미 쉴트 역시 2m11cm, 116㎏의 거한입니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2m18cm.158㎏)은 K-1과 연관이 없는 씨름 선수 출신이지만 지난달 레미 보냐스키에게 판정패하기 전까지 데뷔 후 5연승을 달렸었고요.

일본의 스모 역시 거구들이 득세하는 추세입니다. 26세에 요코즈나에 올라 31번 우승하며 1980년대를 풍미한 지요노후지(1m83cm.127㎏)나 90년대 요코즈나 다카노하나(1m84cm.149㎏)는 거구가 아니었지만 하와이 출신인 아케보노(2m3cm.220㎏)와 무사시마루(1m92cm.237㎏), 그리고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불가리아인 코투슈(2m4cm.143㎏)는 거인들입니다. 우리의 민속씨름이 이만기.강호동의 시대에서 김영현.최홍만의 시대로 옮겨갔듯이 말이죠.

격투기에서 거구들이 득세하는 것은 작은 선수 못지않은 스피드와 운동감각.체력을 갖춘 거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흥행의 측면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민속씨름의 경우 밀어치기를 주무기로 하는 거인 장사들의 등장으로 다이내믹한 기술 씨름이 퇴장했고 이와 동시에 민속씨름의 인기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K-1의 경우에도 거인들의 등장에 작은 선수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앤디 훅처럼 작은 덩치에도 호쾌한 하이킥으로 링을 주름잡았던 파이터들을 기억하는 매니어들의 불만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고민하던 K-1 측은 2002년부터 70㎏대 선수들이 참가하는 'K-1 맥스'를 개최했고, 마사토 같은 스타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격투기 사이트 '싸이뉴스'의 조용직 팀장은 "거인들이 득세하면서 스피드와 기술이 반감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복싱에서 가장 인기있는 체급이 헤비급이듯이 룰을 조정하거나 운영의 묘를 살린다면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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