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가치 낮추기 각국 '換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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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강한 달러 정책을 유지하는 겁니까?"(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강한 달러를 희망합니다. 시장이 평가하겠지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강한 달러가 좋다면 미.일 양국의 이익이 일치할 것입니다."(고이즈미)

"…."(부시는 더 이상 언급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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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미국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캐주얼 복장에 픽업 트럭을 함께 타며 친밀함을 세계에 과시했지만 환율정책에 관한 한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부시와 고이즈미의 회담에서 이례적으로 환율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됐으나 부시 대통령은 강한 달러를 기대한다는 형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경제분야 협의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경제가 악화된 나라(일본)의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미국이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엔화가치 상승으로 일본 경기가 더 후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호소한 셈이다.

일본은 올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제로(0)'에 그칠 정도로 경기가 바닥에 머물고 있다. 엔고로 수출마저 위축되면 경기가 아예 바닥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세계경제 성장의 엔진이 돼야 한다"며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부실채권을 서둘러 정리해 자력성장 기반을 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제성장을 수출에 의존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미.일 정상회담 분위기를 전하면서 환율정책의 미.일 공조 분위기를 연출하려던 고이즈미의 기대가 '헛 스윙'으로 끝났다고 최근 보도했다.

미국.일본.유럽 등 세계 주요 경제권이 앞다퉈 자국 통화가치를 낮추려는 '환율 전쟁'에 돌입했다.

자국의 경기를 우선 부양해 디플레이션(전반적인 물가하락을 동반한 경기 침체)의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서다. 자국의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상품의 가격이 싸져 수출이 늘어나는 데다 수입품 가격은 올라 디플레이션 진행을 억제할 수 있다.

최근 유로화가 초강세를 보이는 것도 미국이 강한 달러 정책을 포기한 탓이 크다. 유로화 가치는 지난 17일 스노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한 뒤 2.9%나 급상승했다.

일본은 엔화 가치가 올 들어 달러에 비해 1.5% 오르자 엔화의 추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1월 이후 직접 외환시장에 개입해 5백억달러 상당의 엔화를 매도했다.

유로권은 일본처럼 직접 시장에 개입하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하하는 간접적인 정책 수단을 통해 유로가치 상승으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유럽 기업의 부담을 낮춰줄 것으로 보인다.

올 들어 유로화 가치가 13%나 오르면서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3월의 유로권 무역흑자는 4백60억유로로 전년 동월(1천3백50억 유로)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다음달 1일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들은 세계적인 경기둔화에 대한 타개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하지만 수출주도형 경제인 일본과 독일 등이 달러 약세에 짓눌려 있어 환율정책을 둘러싼 마찰이 쉽게 해소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서경호 기자

*** 유로는

유럽연합(EU)의 공용화폐. EU 15개 회원국 중 유로 사용에 반대하는 영국.스웨덴.덴마크를 제외한 12개국이 사용하고 있다. 지폐는 7종과 동전 여덟종류가 발행됐다.

지폐는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의 화폐디자이너인 칼리안이 유럽대륙 및 유명 건축물의 이미지를 담아 디자인했고, 동전은 유로 사용국 중앙은행들이 공동으로 디자인했다. 유로화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은 1999년 1월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사용이 허용된 것은 2002년 1월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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