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2. 아시안게임 유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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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서울 유치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상백 박사.

지난 회에 썼던 대로 대한민국은 1970년에 열리는 제6회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65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한국의 국민총생산(GNP)은 3413억원, 1인당 소득은 110달러에 불과했다. 우리의 국력으로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을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서울에 아시안게임의 성화가 불타올랐다면 분명 최고의 대회가 되었을 것으로 믿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66년 방콕 아시안게임 폐막식이 열린 주경기장의 대형 전광판에는 분명히 '1970년 서울에서 만납시다'라는 글귀가 거듭 새겨졌건만.

아시안게임 서울 유치가 공식 거론된 것은 66년 3월 28일 신문회관에서 열린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정기총회에서다. 한국은 아시아경기연맹(AGF) 창설 멤버로서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대회부터 줄곧 선수단을 파견했고 성적도 좋았다. 한국이 인도.필리핀.일본.태국에 이어 대회를 유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AGF 회원국 사이에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가운데 이상백 박사가 이끄는 KOC가 아시안게임 서울 유치를 선언한 것은 순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해 4월 14일 이상백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KOC는 갑자기 사공 잃은 배가 되어 표류했다. 이 박사가 별세한 지 두 달이 지난 6월 14일 KOC는 조선호텔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장 위원장은 6월 18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대회 유치가 국민의 절대적인 여망이며 우리의 분수에 맞도록 대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장 위원장의 회견은 아시안게임 유치 활동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나 역시 스포츠 진흥을 위해 대회를 반드시 유치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7월 18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 김현옥 서울시장, KOC의 김택수.이종갑.윤갑수씨 등이 조선호텔에서 예비회담을 열었고 다음날인 19일 아시안게임 유치위원회가 발족했다. 장기영 위원장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8월 5일 AGF 가맹국에 지지를 요청하는 공식 편지를 보냈고 사흘 뒤엔 정식 개최 신청서를 AGF에 제출했다. 정월터.손기정씨로 구성된 유치1반은 미주와 유럽, 유태영.조동재.이성구씨가 참여한 유치2반은 아시아, 윤갑수.김극환.정태연씨로 짜여진 유치3반은 중동 지역에 파견돼 유치 활동을 벌였다.

여기서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아시안게임 유치가 이슈로 등장하기 훨씬 전에 문교부가 유치 활동과는 상관없이 종합경기장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는 사실이다. 유치 작업이 활발해지자 장경순 국회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종합경기장 건설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와 함께 몇 년간 총공사비 20억2000만원을 투입해 20만 평의 대지에 스포츠 타운을 건설한다는 세부 계획도 발표됐다. 이 청사진에는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경기장과 실내체육관.하키경기장.실내수영장 등이 포함됐다.

아시안게임 유치 활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경기장 건설 계획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자 정부가 태도를 밝혀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12월 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실망스러운 결정이 내려졌다. 대회 운영 경비를 60억원으로 예상할 때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지장이 크므로 유치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방콕에서 활동하던 유치사절단에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전문이 보내졌다. 국무회의의 유치 포기 결정은 스포츠계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그래도 포기하려면 이때 했어야 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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