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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CIA를 통해 본 국제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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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독일 울름에 살던 레바논계 독일인 칼레드 엘 마스리(42.중고차 매매업자)는 2003년 12월 31일 부부싸움 끝에 바람 쐬러 버스를 타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국경에서 마케도니아 경찰에 연행돼 어두운 방에 갇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강제로 약을 먹였다.

깨어 보니 아프가니스탄의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수용소. 춥고 어두운 감방에 갇혀 고문에 시달린다. 5개월 만에 풀려난 곳은 알바니아. "뒤돌아보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앞만 보고 걸었다. 알바니아인의 안내를 받아 모든 검문검색을 무시하고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마스리의 삶을 좌우한 이면의 스토리는 이렇다.

워싱턴에 있는 테러대책반(CTC)은 9.11 수사 과정에서 '칼리드 알 마스리'란 이름을 확인하고 수배했다. 마케도니아 CIA 지부에서 "마스리를 잡았다. 독일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일인물인지는 당장 확인되지 않았다. 일단 '위조 여권'이라고 간주하고 마스리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겼다. 수감 3개월 만에 여권이 진짜로 확인됐다. CIA 내부에서 "아무 흔적도 없으니까 그냥 원위치에 돌려놓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마스리를 알바니아에 풀어놓은 사흘 뒤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가 독일 외무장관에게 '착오'를 통보했다. '절대 보안' 부탁과 함께.

마스리의 비극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이달 초 미국 언론들이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마스리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의 3분의 2, 쿠바 관타나모 기지 수감자의 40%가 테러와 무관한 인물로 확인됐다.

인권단체와 국제기구가 미국을 비난하는 핵심은 고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고문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부인한다. 미국이 생각하는 '고문'의 개념이 국제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CIA가 허용하는 신문 기술은 멱살잡기, 손바닥으로 때리기, 오래 세워두기, 추운 데 벗겨 두기, 물고문(Water Boarding) 등이다. 물고문은 얼굴을 천으로 감싼 다음 거꾸로 묶어 두고 물을 퍼부어 익사의 공포감을 조성한다.

고문금지법안을 추진 중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당)이 "물고문보다는 차라리 구타를 당하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가혹 행위다. 고문은 늘 남용된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비밀수용소와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는 맹견으로 위협, 잠 안 재우기, 전기쇼크 등 불법행위가 자행됐다. 국제인권기구의 주장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수용소에서만 최소 9명이 숨졌다.

아이러니는 CIA가 누린 세계 각국의 협력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해온 독일.스페인 등 유럽의 여러 나라가 CIA 비밀수송기의 운항을 도왔다.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비밀수용소를 운영한 나라로 지목되고 있다. 유럽 외에 아프가니스탄.이집트 등 중동.북아프리카 국가와 태국 등 동남아 국가까지 전 세계에 걸쳐 수십 개국이 도왔다. 유럽 국가들은 협력 사실이 드러나자 뒤늦게 진상조사를 약속하고 나섰다.

불법을 주도한 미국은 큰소리치고, 몰래 도와준 나라들은 이를 감추기에 급급한 게 국제정치의 현주소다. 21세기는 9.11로 시작됐고, 미국은 21세기 인권수준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려놓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오병상 국제뉴스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