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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특구, 국부 창출의 전진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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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덕은 그동안 세 차례의 변곡점을 거쳤다. 1기는 1973년부터 2000년의 대덕연구단지 시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 정부출연연구소들과 SK 등 기업연구소들이 둥지를 틀고 연구를 시작했다. 2기는 2000년에서 2004년의 대덕밸리 시기. 벤처 붐이 일며 연구소에 근무하던 과학자들이 기술을 바탕으로 창업했다. '박사 사장'이 대거 탄생했다. 3기는 올해 시작된 대덕연구개발특구 시기. 과거 과학기술이 산업화의 조연이었다면 이제는 전면에 나서 국부창출의 원동력이 되자는 것이다. 대덕에 그 가능성은 있는가.

올 3월 31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특구 선포식이 열렸다. 며칠 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비롯해 9명의 경제학 박사들이 지역을 방문했다. 지역을 떠나며 이들은 한마디로 소감을 피력했다. "대덕에서 한국의 희망을 보았다."

그들이 본 희망은 무엇일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국가성장은 한 자릿수로 둔화했고, 노동운동 등으로 요소 투입은 한계를 갖게 돼 새로운 성장 방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기술혁신. 한국에서 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과학기술 중심지인 대덕이다. 실제로 연구소와 기업의 협업으로 탄생한 첨단제품이 이곳에는 많다. 그러나 시장 적응성은 낮아 큰돈은 만지지 못했다. 첨단기술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접목하면 국부를 만들 수 있다고 KDI는 진단한 것이다.

특구로 지정된 뒤 앞날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부 지역민의 개발 반대가 있고, 과학자와 기업인 가운데도 특구에 대한 이해가 미진한 경우도 있다.

특구 본부도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면 안 된다. 거름을 주고 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주변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에 먼저 신경을 쓰고, 그 결과 연구결과 사업화란 열매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대덕연구단지 시절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고, 5000명의 박사가 모였음에도 황우석 박사 같은 사람이 나오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과학문화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적어도 3, 4년 뒤를 내다보며 정지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이해도 필요하다. 특구가 있는 줄도 모르는 국민도 상당수 있는데 특구에서 홍보도 하겠지만 이곳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먼저 관심을 가져 주기를 특구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앞길에 난관이 예상되나 특구인들은 3만 달러 시대 진입과 100년 먹거리 마련이란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밤을 밝히고 있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의 이념 과잉 시대에 국토 중앙에서 일어나는 대덕발 실사구시형 한국 혁명에 대해 국민의 관심과 격려가 정말 아쉬운 때다.

이석봉 ㈜대덕넷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