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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총리, 수천만 배 더 억울한 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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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도쿄 총국장

한때 일본 정치를 쥐락펴락했던 백전노장의 정치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그의 현재 타이틀은 ‘생활의 당과 야마모토 다로와 친구들’의 공동대표다. 이 희귀한 당명에는 이유가 있다. 일본에선 정당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5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해 말 총선거에서 오자와의 ‘생활의 당’은 참패, 소속 의원이 4명이 됐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파랗게 젊은 무소속의 야마모토 의원(40)을 모셔왔다. 대신 당명에 개인 이름을 넣어줬다.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총리나 다름없는 2인자’로 무려 420명의 국회의원을 휘하에 데리고 있던 그로선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하나 오자와에게 이는 억울한 축에 못 낀다.

 2009년 8월의 총선을 앞두고 오자와는 민주당 대표였다. 이미 모든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의 정권교체를 예견하던 그해 3월. 오자와는 돌연 도쿄지검 특수부의 타깃이 됐다. 불법헌금 혐의였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과 마찬가지로 근원지는 건설사였다. 예약됐던 것이나 다름없던 총리 자리가 날아갔다. 16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오자와는 결국 무죄를 받았다. 3년8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오자와는 검찰과 여론에 의해 ‘준 범죄자’가 됐다. 사실상 이때 정치생명이 끝났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건 ‘억울함’에 대처하는 오자와의 처신이다.

 주변에선 “사실과 다르니 물러나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오자와는 이를 물리치고 바로 당 대표 자리를 내놓았다. “국민의 의심이 일정 선을 넘어섰다”고 했다. 당시 기자회견 장면이 기억에 선명하다.

 “난 돈 문제에 관한 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게 없다. 하지만 나에겐 더 중요한 게 있다. 여론과 정권(교체)이다. 여론이 의심을 하면 (자리에 연연해선) 안 된다. 정치인의 숙명이다. 단 정권교체와 (재판을 통한) 진실 규명에선 모두 승리하겠다.”

 그의 선택이 정답이었는지 오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적어도 오자와에게 정치인의 격, 지도자의 격을 봤다.

 이완구 총리는 억울할 것이다. 망자의 저주는 물론이고 여론의 비난이 원망스러울 게다. 그러나 억울하다 해서 일국의 총리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 “충청도 말이 원래 그렇다(모호하다)” 등의 ‘해외토픽감’ 발언을 남발해서 되겠나. 한 해에 210번 넘게 통화하고도 “친분이 별로 없다”고 하는 감각을 국민이 이해할 것이라 보는가. 말 뒤집기가 도를 넘어섰다. 영국의 사상가 존 몰리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기억력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국가의 격, 총리의 격을 이만큼 떨어뜨린 것만으로도 이 총리는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는 게 옳다. 이 총리가 뒤늦게나마 사의를 표명한 것은 다행이다. 이 총리는 억울함을 얘기했지만 국민의 억울함이 수천만배 크다는 걸 알기 바란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