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불행했던 첫번째 결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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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 안심마을에서 동생 수만·순음·국현이 4년 터울로 태어났다. 이 동생들은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는 물론 동생들 모두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가난으로 학교에 가 공부할 엄두도 낼수 없었다.
안심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하회의 풍남보통학교도 4k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리도 멀었다.
그 때문에 한글을 쓰고 읽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직까지 문맹이나 마찬가지가 된셈이다.
보통학교에 못가는 대신 할아버지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가며 천자문과 여자의 도리를 배웠으며 할아버지께서는 특히 여자일지라도 근본을 잊지말라고 엄히 가르치셔 지금도 나의 본관이 광산임을 잊지 않고 있다.
어린 소녀시절 고향에는 동네 친구가 많았다. 그러나 너무나 조국을 오래 떠나있다 보니 그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기억할 수 없어 나의 어린시절을 잃은 것 만큼이나 안타까운 심정이다.
문자그대로 초량목피로 연명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14살의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나를 서둘러 출가시켰다.
신랑되는 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양가의 부모끼리 성혼절차를 밟았다.
당시의 풍습도 그랬지만 부모님속셈은 딸자식 하나 입이나마 덜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의 출가를 서둘렀던 모양이었다. 이렇게해서 나는 친정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안동군풍천면귀담동으로 시집을 갔다.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시댁은 울도 담도 없는 초가삼간에 지붕을 이은지 수년이 흐른 듯 비단벌레가 처마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시집에서조차 보리죽도 못끓여먹는 형편이어서 목줄을 매고 살아가는 것이 친정이나 별다를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먹고산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집온 첫날부터 너무나 엄청난 시련에 부딪쳐야 했다.
남편과 첫날밤을 치르고 난뒤 밝은 날에 우연히 남편의 얼굴을 듣어보니 아니나 다르랴 풍병(문둥병) 환자가 아닌가.
마른하늘에 날버락도 유분수지 이럴수가 있을까. 그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는게 견딜수 없었다.
나를 무심히 지켜보는 남편이 역겨워 벌떡 일어나려다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남편과 동침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졌다.
혼례날 『신랑 얼굴이 병색이다』고 동네 아낙네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기는 했었으나 설사 병이 들었거나 조금 몸이 불편한 걸로 알았었지 하필이면 풍병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긴 했지만 맞선 한번 보지 못한채 문둥이 총각한테 시집을 가다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나날이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불안해 견딜수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도 시어머니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내가 겨우 14살의 아직도 한창 자랄 나이에 여러가지 트집을 잡으며 밥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 쳐다보기도 무섭고 배도 고파 구석구석으로 숨으며 어린 마음에 눈물짓기도 수천번이었다.
이런 생활을 1년 가까이 하다 끝내 참지 못하고 어느날 밤 보따리를 챙겨들고 한밤중에 집을 떴다.
마치 귀신에 쫓기듯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하면서 친정에 가니 아버지께서 『죽어도 시가에서 죽고 살아도 시가에서 살라』며 문전에서 쫓아 내보냈다.
이길로 밤길을 걷고 기차를 타며 대구로가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대구라해도 식모살이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이를 악물고 문둥이 남편과 굶주림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버텨 나갔다.
그래도 1년이 지나니 다시 친정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이 그리웠다. 그동안 푼푼이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옷을 사들고 다시 안심마을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반가와 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죽어도 시집에서 죽어라』며 다시 쫓아내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하룻밤만이라도 잠을 자고 가게 하자』고 애원했으나 완고하신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다.
친정에서 쫓겨난 나는 마을앞 못둑길을 돌아 흐느끼며 정처없이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연민의 정에 괴로와하던 어머니가 뒤따라 오면서 『쯧쯧…. 중매장이 얘기만 듣고 사위얼굴 한번 보지 못한채 시집보낸게 이 에미탓이다』며 마구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 부모님은 중매장이한테 속아 나를 출가시켰던 것이다.
딸자식하나 입이 나마 덜려던 그 단순한 부모님의 생각이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목이메어 말을 이을수 없지만 그 마을앞 못둑에서 우리 모녀는 한동안 몸을 떨며 통곡하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그러나 『죽어도 나가서 죽어라』고 고함을 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그만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뒤에 들은 얘기인데 남편과 시어머니는 여러차례 친정집에 찾아와 『며느리를 찾아내라』『색시를 찾아내라』고 행패를 부려 친정부모는 동네가 창피해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으셨다 한다.
이렇게해서 나는 뛰쳐 나온 시집에 다시 발을 디딜수도 없어 무작정 발걸음 닿는대로 고향을 등졌다.
다시 도회인 대구로 나갔던 나는 식모살이로 옮겨다니다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던중 우연히 만난 5살 연상의 두번째 남편을 만나 살림을 꾸렸다.
어느덧 재혼살이가 계속되면서 다시 고향생각이 났다.
두번째 남편과 함께 안심마을 친정집을 다시 찾았을 때는 첫 남편집에서 도망친지 2년이지난 내 나이 17살때였다.
이번 친정나들이에서 아버지는 화를 참으시고 불행한 딸을 맞아 주실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생들이 『제발 하루만이라도 같이 잠을 자고 얘기나 나누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이웃집보기 창피하다』며 다시 나를 내쫓았다.
나는 그날 집에서 자지 못하고 같은 마을에 있던 고모집에서 눈물로 밤을 새고 다음날 새벽 일찍 고향을 떴다. 이때가 나와 고향의 42년간에 걸친 마지막 이별의 날이었다. 【핫차이(태국)=전종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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