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으로] 앞니가 까맣도록 하루 78종 시음 … "향·맛 어울려야 좋은 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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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2015 바쿠스 국제 와인 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이 와인을 평가하고 있다. 나흘간 1651개 와인을 심사해 4개의 대상을 뽑았다. [이소아 기자]

지난달 20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고색창연한 호텔 ‘카지노 데 마드리드(Casino de Madrid)’.

 오전 8시 빗방울이 떨어지는 궂은 날씨에도 정장 차림의 신사·숙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2015 바쿠스 국제 와인대회’에 초빙된 심사위원이다.

 이 대회는 국제와인연합(OIV)과 스페인 정부가 인증한 와인 콩쿠르로 올해 18개국에서 총 1651개의 와인이 출품됐다. 70여 명의 심사위원 중엔 니콜라스 패리스, 사라 제인 에반스 등 전 세계에 322명뿐인 ‘와인 마스터(MW·Master of Wine)’도 9명이나 포함됐다. 특히 이번 대회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신근중(42) 이마트 주류팀장이 심사위원으로 초대됐다. 한국 와인 시장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방증이다.

한국인 첫 심사위원으로 뽑힌 이마트 신근중 주류팀장이 향을 심사하고 있다(왼쪽). 기자도 직접 심사 체험을 해봤다. [이소아 기자]

 첫날 미션은 1인당 78종류의 레드와인을 시음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 심사위원들 앞에는 각각 10개의 와인잔과 검은색 통, 생수, 밀가루로만 구워낸 과자가 놓였다. 입안에 머금었던 와인은 이 통에 뱉어내고 과자로 이전 와인의 맛을 지운다. 와인은 이름은 물론 생산지·출하연도·가격이 가려진 채 오직 ‘참가번호’로만 구분된다. 낭만적인 와인의 향연은 없었다. 테이블마다 두툼한 채점표가 쌓인 대회장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와인 평가표는 3개 부문으로 이뤄졌다. 우선 외관평가는 투명도(Limpidity)와 빛깔(aspect)로 나뉜다. 미세한 부유 물질 없이 맑고 윤이 나면 좋다. 보통 레드와인은 잔을 밖으로 기울이고 화이트와인은 안쪽으로 기울여 빛의 투과 상태를 살핀다. 향은 불쾌함 없음(genuineness), 농도(positive intensity), 조화로움(quality)이 기준인데 ‘불쾌하게 거슬리지 않으면’ 일단 합격. 맛은 여기에 지속성(persistence) 항목이 더해진다. 한 모금 입에 넣어 혀와 입안 전체에 고루 적시고 입을 살짝 열어 와인과 공기의 조화를 본다. 산도와 떫은 정도(타닌), 알코올의 어울림을 판단하는데 ‘호로록 호로록’ 입안에서 굴리는 사람, 지긋이 머금고 입안 여러 곳을 자극시키는 사람, 두 번째 모금으로 판단하는 사람 등 제각각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 전반적 평가(overall judgement) 점수를 매긴다.

 이내 테이블마다 토론이 시작됐다. “각자 자기 기준이 관대한지 엄격한 편인지 알고 있겠죠. 평가 범위를 비슷하게 조율해보죠.” “좋아요. 하지만 전 솔직하게 할 겁니다. 이거다 싶으면 점수를 후하게 줘야 뭔가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20잔의 와인이 잔에 담기자 심사 과정에 속도가 붙었다. 와인들은 더욱 확연히 개성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은 달콤한 딸기향이, 어떤 와인은 인공적인 사탕향이, 신기할 만큼 땅콩향이나 버터향이 뚜렷한 와인도 있었다.

 “오…말(Mal·나쁘다는 스페인어).” 한 심사위원은 와인을 입에 넣자마자 통을 부여잡고 뱉어냈다. 심사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10번 테이블에선 세 차례나 와인을 바꿔 내오라는 요구가 있었다. 반면 422번 와인의 경우 “와, 프레시하네.” “이건 (최고 와인) 가능성이 있는걸?” 등 공통적인 호응을 얻었다.

 어느새 심사위원들의 치아는 짙은 보랏빛으로 변색됐지만 상대의 검푸른 앞니를 보며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9번째 와인 심사가 끝난 뒤 잠시 휴식 시간. 신근중 팀장은 “평가할 때 아무래도 한국 일반 소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대형마트에 처음으로 단독 와인숍과 와인장터 행사를 도입하고 반값 와인(‘미라수’)을 출시해 가격 거품을 뺀 주인공이다. 2012년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프랑스 보르도·메도크 지역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프랑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직거래해 칠레산 와인 ‘로스바스코스’ 가격을 40% 낮춰 2만5000원에 팔았다. 반신반의하던 샤토 로칠드 가문은 로스바스코스가 연간 10만 병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우자 지난해 11월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보르도와 메도크 본토 와인을 이마트 21주년 단독 에디션으로 공급했다. 신 팀장은 “한국 소비자는 빛깔이 진하고 향이 풍성하되 거칠지 않고 목넘김이 부드러운 와인을 좋아한다”며 “100점 만점에 90점이 넘어가는 와인은 복잡미묘한 향과 맛이 기분 좋게 어울리는 복합미를 가진 와인”이라고 말했다.

 2002년 입사 당시 ‘와’자도 몰랐던 그는 이제 와인의 매력에 푹 빠졌다.

 “다른 술은 나나 상대나 느끼는 맛이 다 비슷해요. 하지만 와인은 각자에게 너무 달라요. 그걸 매개로 상대를 알아가고 대화를 나누기에 정말 좋죠.”

 현재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은 한국 등 아시아 와인시장을 적극 공략 중이다.

 페르난도 자크 스페인 와인협회 회장은 “스페인 레드와인은 뚜렷한 개성과 진한 풍미를 지녔고 화이트와인은 오크통을 사용하지 않아 과일향과 꽃향기가 강하다”며 “클래식하면서 새로운 조화를 원하는 한국 소비자에게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실제 스페인은 프랑스·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합리적 가격을 앞세워 지난해 와인 수출국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한 당시 청와대 공식 만찬주로 쓰인 와인이 바로 스페인의 ‘도미니오 드 핑구스’다. 와인 전문가들은 온도가 높고 볕이 쨍쨍한 칠레·스페인·미국 와인이 당분간 한국에서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본다.

 니콜라스 패리스 와인 마스터는 “와인이 대중화되려면 다양한 와인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하고 술이 아니라 식사의 일부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며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대부분 10달러(약 1만원) 이하의 와인을 수퍼마켓이나 대형마트에서 사 마신다”고 말했다. 바쿠스 와인 콩쿠르는 이후 화이트·로제·스파클링 와인을 대상으로 사흘간 더 진행됐다. 잇따른 강행군에 쓰러지는 여성 심사위원도 나왔다. 그 결과 4개의 대상과 178개의 금상, 206개의 은상작 와인이 가려졌다.

 심사를 마친 신 팀장은 “주최 측에서 한국 시장의 의견을 더 많이 듣고 싶다고 성화”라며 웃었다. 신 팀장은 5월 가정의 달을 앞두고 4월 중순께 이번에 뽑힌 30여 개 와인을 1만~5만원대에서 국내에 선보일 계획이다.

마드리드=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S BOX] 경주마처럼 족보 따져 관리했더니 … 호주 와인, 등급 좋아져

호주는 연간 7억5000만L의 와인을 수출하는 세계 4대 와인 수출국이다. 그 바탕에는 ‘호주 와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앤드루 카이야드(55·위 사진)가 있다. 오늘날 호주 와인의 평가 척도인 ‘랭턴스(Langton’s) 등급’을 만든 인물이다.

 1991년 카이야드는 신흥 산지 격인 호주 와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랭턴스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성공의 비결은 철저한 팩트 중심의 평가였다. 대표적인 예가 와인의 ‘족보(track record)’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호주 경주마를 관리하는 ‘폼 가이드(form guide)’에서 따왔다. 최근 본지와 만난 자리에서 카이야드는 “경마 강국인 호주는 말의 종(種), 혈통, 우승 경력, 조련사 등 각종 정보를 폼 가이드에 꼼꼼히 적는 것이 기본”이라며 “와인의 등급 역시 철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카이야드는 “최소 10년 이상의 빈티지 생산, 현재 확보 가능한 수량, 최근 가격 추세 등도 감안해 가이드북에 최종 등재할지 여부를 결정한다”며 “최신판인 2014년 가이드북에는 호주 와인 139종의 이름을 올렸다”고 말했다.

와인의 등급은 익셉셔널(Exceptional)-아웃스탠딩(Outstanding)-엑설런트(Excellent)의 3단계다. 지난해 기준 최고 등급인 익셉셔널은 21종이, 아웃스탠딩과 엑설런트 등급은 각각 53종, 65종의 와인이 받았다. 랭턴스 가이드북에 실리는 와인은 가격이 배 이상 뛴다. 이름만 올려도 병당 30~50호주달러(약 2만5000~4만2500원), 좋은 평가를 받으면 100호주달러(약 8만5000원)도 훌쩍 넘는다. 익셉셔널 등급을 받았던 펜폴즈 그랜지 1951년 빈티지는 6만 호주달러(약 5100만원)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말 한·호주 자유무역협정(FTA)의 영향으로 최대 15%가량 가격이 내려 호주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현택 기자

스페인 ‘바쿠스 와인대회’ 참관기
심사위원 70여 명 … 한국인 첫 참여
18개국 출품 1651종 마셔보고 채점
잔 10개, 검은 통, 생수, 입가심 과자
평가도구 받은 뒤 빛·맛·향 종합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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