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환의 유레카, 유럽] '나치 약탈' 최대 400조원 … 전쟁배상 카드 꺼낸 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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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1944년 6월 10일 그리스 디스토모 마을에서 학살한 주민 200여 명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기념묘지. 그리스 대법원은 2000년 독일 정부에 학살 책임을 물어 유가족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독일은 정치적·법적으로 종결된 사안이라며 배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 [디스토모 신화=뉴시스]

1941년 4월 27일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하켄크로이츠(나치를 상징하는 갈고리십자) 깃발이 게양됐다. 이후 독일 나치는 44년까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과도한 전쟁비용을 강제로 물리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 같은 나치의 그리스 점령은 사실상 잊혀진 역사나 다름없었다. 독일 학생들은 역사 수업 시간에 디스토모·테르모필렌·칼라브리타 같은 그리스 도시에서의 나치친위대(SS)와 점령군에 의한 학살은 배우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바르샤바 등에서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처럼 과거사 재조명 작업과 청산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다. 44년 6월 10일 주민 218명이 나치에 학살당한 그리스 디스토모의 루카스 지시스 부시장은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독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는 2차 대전 핵심 전범국 독일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그리스 정부와 의회는 독일 정부를 상대로 전쟁배상을 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지난 1월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한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독일은 제대로 보상한 적이 없다. 나치 범죄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며 이들이 그리스에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할 도덕적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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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가 요구할 배상금은 적게는 110억 유로(약 13조원), 사회간접시설 파괴 등을 포함하면 최대 3320억 유로(약 400조원)까지 거론되고 있다. 독일 역사가 하겐 플라이셔는 “점령 기간 나치가 그리스 중앙은행을 압박해 강제로 빌린 돈은 반드시 상환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가로 110억 유로에 달하는 강제대출액은 그리스가 현재 독일에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있는 650억 유로의 17%에 달한다. 그리스는 독일이 빼앗아간 고대 예술품에 대한 배상(15억 유로)도 요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독일은 53년 런던부채협정에 따라 이미 배상했으며 이로써 이 사안은 종결됐다고 주장한다. 서독은 전후 전쟁 배상금으로 710억 유로를 지불했으며, 그리스의 나치 범죄 희생자 유가족들에게도 5750만 유로를 배상했다. 그러면서 공식 배상은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1990년 정작 통일이 이뤄졌을 때 헬무트 콜 총리는 승전국과 맺은 조약을 ‘2+4 협정’이라고 바꿔 교묘하게 이를 피해 나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독일에선 이번 기회에 배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의 중진 랄프 슈테그너 의원은 “우리는 배상 문제를 논의해야만 한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국제적 법률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70년 전 5월 8일 나치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이후 독일은 그동안 홀로코스트 등의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 등에 적극 나서 반성의 진정성을 인정받은 모범 과거사 청산 국가였다. 하지만 유럽 재정위기 이후 나 홀로 ‘독야청청’한 경제대국으로 입지를 굳히면서 주변국, 특히 재정위기 국가들로부터 볼멘 항의를 받고 있다. 단일통화인 유로화의 도입으로 인한 수혜는 독차지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다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가입국에는 가혹한 긴축과 경제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전쟁 침략’의 과거사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경제 침략’의 현대사와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독립그리스인’당의 파블로스 카이칼리스 의원은 주간지 슈테른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오늘날 이런 문제에 봉착한 것은 독일의 침공에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 콧수염을 하고 탱크를 앞세워 진군하는 메르켈의 그림은 만평이나 시위 피켓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스페인 뿐 아니라 폴란드 ·이스라엘에서도 독일의 독주를 견제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부에선 히틀러의 ‘제3제국’에 이어 메르켈 총리가 ‘제4제국’을 꿈꾸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직까지는 그리스 외에 다른 피점령국들이 드러내놓고 독일에 과거사 청산, 전쟁배상을 요구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독일 역사의 끔찍한 유령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비난하는 나라들이 그리스와 같이 과거사를 청구서로 내놓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결국 메르켈 총리와 독일 정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리스와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 독일의 결정은 유로존과 유럽 전체, 더 나아가 세계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에서도 과거사 청산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경환 중앙SUNDAY 외교안보에디터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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