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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대한민국은 교육 실험공화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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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서울교대 교수

얼마 전 수많은 학부모가 참석한 대학 입시 설명회장에서 한 강사가 “대입제도변경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자 많은 학부모가 크게 환호하며 동의했다고 한다.

 ‘매년 왔다 갔다 하는 교육 정책에 너무 힘들다’ ‘고3이 실험쥐냐’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교육 현장은 물론 많은 학생, 학부모로부터 나오고 있다. 고1·2·3 학생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수능이 적용된다. 고2 학생이 치르는 2017학년도 수능은 국사가 필수과목이고, 고1 학생이 치르는 2018년도 수능은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뀐다. 또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에 따라 2021학년도 수능도 이미 전면 개편이 예고된 상황이다. “큰애와 작은아이의 교과서가 다르고 입시 제도가 너무 복잡해 알기도 어렵고 자녀 지도가 불가능하다”는 학부모의 탄식이 나온다.

 교육과정과 입시뿐인가. 선행학습의 폐해와 사교육비 부담을 줄인다는 취지로 학교 정규 교과와 방과후학교 선행학습을 규제하는 ‘선행학습금지법’도 교육부가 시행 6개월 만에 방과후학교에는 허용하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결국 학원은 광고만 규제하면서 정작 학교의 선행학습만 옥죄는 모순을 뒤늦게 인정한 것이다.

 검증 안 된 설익은 교육 정책에 신음하는 학교 현장은 ‘개혁 피로증’으로 인해 교육의 본질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권과 교육감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와 교육과정을 변경하는 바람에 교육 현장은 안정되지 못하고 학생·교원·학부모는 어려움을 겪는다.

 2009년부터 비리·선거 등으로 교육감이 네 번이나 바뀐 서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급식, 등교 시간, 자사고 정책, 고교선택제,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까지 교육감의 성향에 따라 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계속 바뀌었다. 교육부와 소송 전쟁까지 치르는 갈등 속에 서울 교육은 아직도 갈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최근에도 ‘9시 등교제’ ‘자사고 폐지’ ‘고교 자유학년제’ 등 각종 실험적 정책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민정부와 교육감직선제 실시 이후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5년 단임 정권의 교육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단발적 교육실험 정책이 남발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백년지대계’가 아니라 ‘교육오년지소계(五年之小計)’라는 말까지 나온다. 또 임기 내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학생은 물론 국민의 삶의 시계를 바꿀 9시 등교제, 9월 학기제, 시간선택제교사제, 방학분산제, 자유학기제 등 시간 관련 정책으로 찬반 갈등과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학교 개방을 내세운 ‘열린교육’ 실험, “하나면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무모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교육의 실패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이해찬 세대’라는 말이 회자됐었다. 이제 이런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남발되는 교육실험 정책과 인기 영합 정책을 차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교육이 추구해야 할 항존적(恒存的) 가치를 무시하고 변화만이 교육의 발전이라는 교육의 본말 전도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교육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일관성·연속성·안정성이 최우선돼야 한다. 긴 안목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시대 흐름을 반영하고 잘못된 것을 바꿀 때는 그에 따른 부작용과 대안 마련이 전제돼야 한다.

 둘째, 대통령과 교육감 선거 때 재정 확보 계획이 뒷받침되지 않는 공약은 금지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요구된다. 후보자들은 득표에 조금만 도움이 되면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고, 유권자들은 이런 달콤한 당의정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이런 악순환을 차단하려면 선거 공약에도 예산이 확보돼야 추진하는 ‘페이고(Pay Go) 원칙’ 도입이 필요하다.

 셋째,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나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인성 교육을 위해 학생을 중심으로 교원과 학부모가 동지(同志)적 뜻을 공유하는 학사모(學師母)가 함께하는 사회적 실천운동을 제안한다. 교육의 기본은 학교 현장이다. 학교의 존재 이유와 교육의 목적을 교사와 학부모가 공유할 때 인성 교육이 가능하고 공교육은 활성화되게 된다.

 넷째, 국가·사회적 대토론을 통한 국가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민관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프랑스·미국 대입 제도의 큰 틀이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는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국회-교원·학부모단체-학계 등이 참여하는 ‘가칭 국가교육위원회’를 구성해 국가·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 한 일간지에 보도된 ‘국민 1000명의 설문조사’ 결과 국민 열에 아홉은 “교육 정책만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정부나 국회와 교육감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대통령과 교육감은 임기가 끝나면 떠나지만 잘못된 실험주의 정책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 학부모, 학교 현장에 남아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 대한민국 미래와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만은 결코 ‘정책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서울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