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파킨슨병 15년째 앓는 의사 … 고통 속에서 길을 찾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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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김혜남 지음, 갤리온
288쪽, 1만4000원

의사라고 불치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라고 불치병 진단을 받고 냉철한 심리적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4년 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저자도 그랬다. 몸이 굳고 행동이 느려지면서 장차 우울증·치매·편집증까지 나타나는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대개 노년에 발병하는 것과 달리 당시 그는 병원을 막 개업하고 한창 일할 43세였다. “내가 왜 그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섭고 끔찍했으며, 세상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의사라서 이 병을 너무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우울증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성실한 일상을 이어갔다. 증세가 심해져 지난해 병원을 닫기 전까지, 의사로서 환자를 상담하고 치료했다. 자신의 병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같은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되었다.

 파킨슨병이 가져온 고통과 좌절이 곳곳에 녹아 있지만, 이 책은 투병기는 아니다. 그의 삶에 힘든 일은 갑작스런 병마만이 아니었다. 고교시절 언니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일, 응급실에서 일하다 첫아기를 유산한 일,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마뜩찮아 하는 시부모를 한집에 모시고 살며 겪은 일, 일과 육아에 고루 지쳐 결혼을 깰까 생각한 일, 인턴을 마치고 대학병원에 남지 못해 좌절한 일, 첫 직장에서 상사의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린 일…. 저자는 삶에서 아프고 힘들었던 대목을 언급하며 여기서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 정신과 전문의만 아니라 50대 중반에 이른 생활인으로서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도움말은 의사가 환자에게, 저자가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가끔은 그 스스로를 위한 조언이자 자가치유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도움말이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려 하지 말라, 때로는 ‘버티는 것’이 해답이다, 사소한 일까지 ‘상처’라고 말하지 말라 등등은 인생의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말로도 손색없다.

 책장을 덮고 나면 저자의 용기를 떠올려보게 된다. 늘 남의 힘든 얘기를 듣는 게 일이었던 그가 스스로의 힘듦을, 삶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는 건 만만찮은 용기가 필요했을 터다. 그는 병마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대신 병 때문에 얻은 바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그의 말대로다. 이 책에 지금 같은 제목이 붙은 이유를 헤아리게 한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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