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 추모식서 악수한 미·쿠바 정상 … 1년 뒤 국교 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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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서 처음 만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가운데).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옆에 서 있다. 오른쪽 사진은 2000년 6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전 총리 합동장에서 마주친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오른쪽). [중앙포토]

2013년 12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버그 FNB월드컵경기장.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헌사를 위해 연단을 오르려다 마주친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했다. 불과 몇 초간이었지만 그 파장은 컸다. 외신들은 “평화의 수호자 만델라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그 선물상자는 지난해 12월 열렸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 선언이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짧은 악수가 국교 정상화의 서곡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만델라의 추모식에는 91개국 100여 명의 전·현직 정상들이 집결했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 빠져 비웃음을 산 정상도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였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경비 절약. 하지만 이스라엘 언론까지도 “그는 어떤 선택에 대한 대가가 더 큰지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네타냐후의 불참을 계기로 오히려 만델라가 생전 팔레스타인인의 자유를 강조해 온 일이 더 부각됐다.

 ‘조문외교’의 현장은 조용하지만 이처럼 치열하다. 29일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장례식에서 이 장이 다시 열린다. 박근혜 대통령의 조문외교 데뷔 무대이기도 하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추도식이 세계적 조문외교의 무대였다면 이번엔 동아시아 최고의 조문외교 무대가 열리는 셈”이라고 말했다. 박준우(전 싱가포르 대사) 세종재단 이사장은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리 전 총리를 만난 직후 개혁·개방을 시작했기 때문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이번 장례식에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정상들이 참석하는 조문외교는 단순히 고인을 기리는 수준을 넘어선다. 연세대 문정인(정치외교학) 교수는 “정상급이 추도하러 가는 것은 친분뿐 아니라 양국 관계 강화, 서거한 지도자가 표방하는 가치의 공유, 국내 정치적 변수 등 여러 요소와 메시지를 동시에 고려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81년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이다. 이집트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현실주의 노선을 표방, 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등 중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일했다. 그는 4차 중동전쟁 기념식 중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런 사다트의 장례식에는 미국 역대 대통령이 세 명이나 참석했다.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리처드 닉슨 등이었다. 외교가 소식통은 “중동 평화가 세계적 이슈로 무게감을 갖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사다트의 서거가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올 1월 서거한 압둘라 압둘아지즈 사우디 국왕을 조문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인도 순방 일정까지 하루 줄이고 직접 간 것도 조문외교의 성공 사례다. 이란과의 핵 협상 등으로 맹방인 사우디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를 감안한 것이다. 답례로 살만 신임 국왕은 공항에까지 나가 오바마 대통령을 영접했다. 미국과 사우디 관계가 복원된 건 조문외교의 덤이었다.

 전문가들은 첫 조문외교에 나서는 박 대통령에게 자연스럽게 싱가포르 국민, 각국 정상과 마음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은 “뭔가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니 싱가포르의 특성을 잘 고려해 위로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일이 있다. 의전장을 지낸 백영선 전 주인도 대사는 “조문외교는 국빈방문과 달리 최소한의 의전만 갖춘 조용한 외교라는 특징이 있다. 장례식에 모일 많은 아시아 지도자들과 조용하되 실리적으로 양자회담들을 추진하면 한국 외교의 새로운 모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고려대 김성한(전 외교부 2차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장례식장은 정상 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가능한 일종의 비공식 다자외교 현장으로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한다면 박 대통령과 자연스러운 조우를 기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수진·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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