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아일랜드식 사회협약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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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섬나라 아일랜드의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 여사가 21일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아일랜드는 사회협약을 맺고 10여 년 만에 국민소득을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끌어올린 부자 나라다.

아일랜드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린 '이류 국가'에 불과했다. 87년의 경우 실업률이 16.8%에 달했고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18%로 극심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용기회가 격감하자 고학력 노동자들이 무더기 이민에 나서 노동력의 이탈이 빠르게 진행됐다. 마치 우리가 겪은 IMF 광풍의 전야처럼 폭풍이 몰아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87년 출범한 공화당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을 국정운영의 핵심 의제로 설정했다. 노사정 합의를 통한 3년 단위 국가정책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정부는 물론 노총.사용자 연맹.농업 조직이 참여한 '국가 경제사회 위원회'를 구성했다.

연대협약의 방향은 간명했다.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저임 근로자의 보호를 강화하고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추진해 노사정 공동 심사위원회에서 철저하게 합의사항을 감독했다.

아일랜드 노사정 합의는 87년 1차합의(국가회복 프로그램)를 시작으로, 2차합의(경제사회 진보를 위한 프로그램), 3차합의(경쟁력과 고용 창출을 위한 프로그램) 등 국가적 주요 어젠다를 포괄하면서 최근 6차합의에 이르렀다.

법과 제도의 틀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사회세력 간의 합의를 통한 협력이 국가적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공통 인식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부가 노사 단체의 협조를 위해 사회적 단결을 화두로 적극적인 홍보와 설득에 나섰고 50%의 노조조직률을 기록하며 강력한 단일 노조 전통을 이어오던 노동계에서도 실현 가능한 사회협약에 초점을 맞추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극 부응한 것이다.

사회협약 이후 아일랜드는 집권 정당이 바뀌는 등 정치환경이 변화했지만, 사회 주도 집단의 '사회적 동반자 정신'은 확고한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사회적 합의 정신은 노사 외에 시민단체까지 그 정신이 파급됐다. 정당이기주의를 초월한 경제사회 정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연대가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95년부터 5년간 평균 9%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제조업의 생산량은 연평균 12% 증대되는 고성장을 이룩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이 기간 평균 2.5%대의 성장을 기록한 점을 감안하면 아일랜드 경제의 선전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실감할 수 있다. 실업률도 90년 18%까지 치솟았으나 2000년에는 4%에 머물렀다.

물론 아일랜드 고성장은 단순히 사회적 협약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매컬리스 대통령이 국내 한 통신사와의 회견에서 밝혔듯 교육에 대한 집중 투자, EU권에서 영국 이외의 유일한 영어 사용 국가, 기업 유치에 유리한 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정부와 노동자, 농민, 사용자, 공익 대표가 참여해 개별 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 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협약을 만들어 낸 것이 국가적 기회를 살린 가장 큰 원동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미래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운이 겹쳐야 '대성(大成)'이 가능하다.

우리도 지난 1월 열린우리당이 한국적 특성에 맞는 사회적 합의 모델로 '선진사회 협약'을 제기하고, 한나라당도 이에 화답하는 등 정치권 차원의 논의가 활발하다. 아직 구체적 내용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노사정 대합의를 위한 여건 마련에 중요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부와 기업 등 각 분야의 사회적 합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 목적과 비전이 선진 한국으로 가는 분명한 길이라면 각 주체들에 취지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영국 ‘위너스 홀딩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