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이회창·이인제… 권력실세들 '전방위 도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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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15일 밤 구속됐다. 취재진이 호송차량을 에워싸고 취재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친인척을 포함해 무려 1800여 명의 국내 주요 인사들을 상시 도청해 온 사실이 15일 검찰 수사로 밝혀졌다. 도청 대상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포함해 당시 정권 실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전 민주당 고문 등 여야 정치인 등이 포함됐다.

검찰이 이날 이같은 혐의로 김대중 정부 때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신건씨를 함께 구속함으로써 불법 도청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이날 공개된 임.신씨에 대한 구속영장에는 이들이 재직할 때 국정원 8국 직원들이 R-2(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친인척을 포함해 무려 1800여 명의 국내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 놓고 24시간 상시 도청한 사실이 그대로 기재됐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임.신씨가 국정원의 최고책임자들로서 주도적으로 도청에 관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국가정보기관의 장기간에 걸친 조직적.계획적.무차별적으로 이뤄진 범행에 대해 엄벌해야 한다"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 누가 도청당했나=두 사람이 국정원장으로 재직할 때 국정원의 도청 대상은 김대중 대통령 친인척, 여야 정치인, 언론인, 경제인, 고위공직자 등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망라됐다. 검찰은 당시 8국이 실시했던 구체적인 도청 사례들을 각각 10여 건씩 영장에 적시했다.

이에 따르면 임씨는 특히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던 정부의 대북지원 정책과 관련, 2000년 말부터 2001년 초까지 통일부 장관과 통일부 공무원들의 통화내용을 도청토록 지시했다. 한나라당의 안기부 동원 정치자금 모금사건인 이른바 '안풍'관련자들도 도청 대상에 올랐다. 2000년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과 관련, 이모씨 등 총선 출마자들과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한 한국논단 사장 이모씨 등이 도청 대상이 됐다. 또 같은 해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 현대그룹 후계자 문제, 현대아산의 대북사업과 관련해 정모씨 등 현대 관계자들의 대화도 도청됐고 의약분업 사태 때 신모씨 등 의사협회.약사협회 간부들도 피해를 봤다.

임씨는 2000년 10월 말부터 2001년 3월까지 햇볕정책을 비판하고 다니는 지모씨에 대해 집중적으로 첩보를 수집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최규선게이트'의 주역인 최씨에 대해서는 임씨가 원장으로 있을 때 도청이 시작돼 후임 신씨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드러났다. 2000년 10월 부터 2000년 말경까지 이형택씨 등 대통령 친인척이 문제를 일으키자 이모씨 등 다른 친인척의 통화가 도청됐으며, 2000년 말 안기부 비자금의 정치권 유입 의혹이 제기되자 강삼재 의원도 도청 대상에 올랐다. 2001년 5월 안동수 장관 임명과 관련해 민주당 관계자간 통화가 도청됐으며, 2001년 여름 황장엽과 이모 전 의원간 통화가 도청됐다. 또 2001년 말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 간의 통화를 불법 감청했다. 당시 박의원은 언론사 대주주가 구속되자 단식농성을 벌였으며, 국정원은 김 전 대통령과 그 측근이었던 박 의원과의 전화통화를 도청했다. 2002년 3월 민주당 이인제 고문이 전갑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현 정권의 핵심지역인 광주 경선 결과에 따라 수도권 대의원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광주의 표 45% 이상이 나에게 오도록 힘써달라"고 요청한 것도 도청됐다.

국정원이 수집한 도청 내용에는 불특정 국내 인사들 간 금전관계, 사무실 운영관계, 여자관계, 자기 과시 내용 등이 무작위로 수집됐다. 고위공직자 박모씨의 취업알선 비리 등도 도청으로 포착됐다.

이와 함께 2002년 3월에는 한나라당 김모 의원과 중앙일보 기자 간 '이회창 총재의 당내 인적 쇄신 요청'과 관련된 통화내용이 도청되기도 했다.

검찰은 두 사람에 대한 영장에서 ▶국가기관인 국정원이 국내인사들의 휴대전화를 무차별적으로 24시간 도청했고 ▶대통령의 근절 지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산을 투입해 도청장비를 개발했으며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잠재적 피해자로 삼은 점 등을 강조했다.

◆ 1800명 어떻게 도청했나=임.신씨의 구속영장에 따르면 국정원의 비밀 감청부서인 8국(과학보안국)은 최대 3600회선까지 접속할 수 있는 R-2 감청장비 6세트를 상시 가동했다. 8국 운영단 산하 국내수집과 소속의 R-2 수집팀에 감청장비를 설치한 다음 서울 광화문.구로 등 6개 전화국에서 유선중계 통신망 회선을 끌어와 연결했다. 미리 입력된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 통화가 시작되면 R-2 모니터가 빨간색으로 표시되는 특성('빨간불 감청')을 적극 활용했다.

검찰 관계자는 "빨간불 감청과 달리 국정원이 시내 전화국에서 끌어온 유선중계통신망을 통해 일반 휴대전화의 통화내용이 시작되면 파란불이 깜박였다"며 "8국 직원들이 일반인의 통화까지 무작위로 엿들었다는 것은 사실상 도청 피해자가 전 국민이었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R-2를 이용해 수집, 작성된 불법 도청 자료는 매일 두 차례(출근 직후 및 퇴근 직전) 8국에서 중요 사항을 A4용지 반쪽 크기의 보고서에 대화체로 요약했다. 감청시간이 기재된 통신첩보는 '8국'이나 '친전'이라고 기재된 봉투에 넣어 밀봉 상태로 이들이 받아봤다는 것이다. 또 임.신씨는 주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관심을 나타내거나 첩보 수집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도청을 지시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두 사람은 국정원이 자체 개발한 CAS(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이용해 도청을 독려한 혐의도 받고 있다.

◆수사 어떻게 되나=이들 전직 원장이 구속됨에 따라 검찰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이 불법 감청을 통해 입수한 도청 정보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등을 규명할 방침이다.

또 불법 도청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배경과 추가 혐의 등도 조사한다. 검찰 관계자는 "이들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기소가 가능하다"며 "앞으로 보강 수사를 통해 불법 도청의 실태를 상세히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보강 조사를 거쳐 구속기소한 뒤 이르면 다음달 초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4개월 가까이 진행된 수사를 일단락지을 방침이다. 국정원장에게까지 보고된 불법 도청 정보가 당시 정권 실세, 정치권 유력 인사 등에 유출됐는지와 일부 언론 보도로 공개된 불법 도청테이프 내용 수사 등도 수사 대상이다.

일단 수사의 초점을 불법 도청 자료의 외부 유출 쪽에 맞출 계획이다. 검찰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등이 폭로한 도청 문건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정원 불법 도청 자료의 외부 유출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게 한나라당 폭로 문건"이라며 "당시 폭로 당사자였던 정형근 의원과 이부영.김영일 전 의원 등에 대한 소환 조사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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