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노란 리본'에서 빠트린 사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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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 글에선 전후 납북자 484명과 국군포로 546명 등 모두 1030명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을 빠트렸다. 중앙일보 출신의 한 선배가 "왜 전쟁 중 납북된 사람들은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유감을 표시했다. 처음엔 '전쟁 와중의 피해를 사회가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가족들의 피맺힌 증언을 접하곤 중대한 실책임을 깨달았다. 이들의 생이별 상처는 55년의 세월에도 전혀 아물지 않았다. 강제로 끌고 간 북쪽에 대한 원한에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남쪽에 대한 원망까지 쌓여 가슴의 응어리는 더 커지고 깊어졌다. 생사라도 알고 싶고, 유해라도 모시고 싶다는 가족들에게 전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나의 실책을 지적해 준 회사 선배도 납북자 가족이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씨의 일장기 말소 사건 주역 중 한 명인 이길용 당시 동아일보 체육담당 기자가 그의 부친이다. 이길용 기자는 그 사건으로 구속되고 신문사에서 쫓겨나는 고초를 겪었다. 해방 직후 복직한 뒤 6.25 무렵에는 대한체육회 상무이사로 '대한체육사'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인 7월 17일 서울 성북동 집 근처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뒤 지금껏 귀가하지 않고 있다. 당시 51세. 살아 있다면 106세다. 평양까지 강제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황신덕(작고)씨로부터 "북쪽에 당도해 보니 함께 피랍된 이길용씨가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 소식이다.

그때 열 살 소년 태영은 지금 65세로 '자기보다 젊은 아버지'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피랍 이유조차 몰라 답답했어. 아마도 돌아가셨겠지. 유해 송환이 이뤄져 제사를 모시고 싶은 게 남은 소원이야. 이젠 증오도 사라졌어." 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체육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이태영씨의 부친처럼 한국전쟁 중 강제 납북된 인사는 수만 명. 그러나 현 정부는 납북자 수가 정확히 몇 명인지, 북에 가선 어떻게 됐는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아' 가족들은 속이 터진다. 가족들이 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져 몇 가지 자료를 찾아냈다. 52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6.25 피납치자 명부'엔 피살자와 행방불명된 자를 제외한 '납북자' 8만여 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54년 내무부에서 작성한 '피납치자 명부'에는 1만7940명이 들어 있다. 대한언론인회가 펴낸 책 '돌아오지 못한 언론인들'속엔 납북 언론인 226명의 명단과 연행 과정의 험악한 분위기, 가족들의 애끓는 사연 등이 가득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묻혀 버린 채 우리 사회는 지금 한국전쟁 중 '미군과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피해 사건들만 '철저히' 다루고 있다. 북한 측이 저지른 숱한 학살.납치 사건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미 확인된 사항"이라는 게 이유란다. 하지만 6.25 중 납북자 문제처럼 조사.정리되지 않은 사건도 수두룩하다.

전쟁 상대자의 잘못엔 너그럽고, 전쟁 상대자로부터 본 피해는 애써 눈감으면서, 아군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춰 목청을 높인다. 이 기막힌 뒤집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조사해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 주는 작업은 필요하다. 다만 그만한 정성으로 '적군'에 의한 국민의 피해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돌봐야 하는 국가의 의무이자 도리가 아닐까? 전쟁 중 납북자 문제야말로 '과거사 조사'의 첫 과제로 다루고, 생사 확인.유해 송환에 정부가 앞장서야 마땅하다.

올 가을 단풍이 유난히 곱다. 특히 길거리를 뒤덮은 샛노란 은행잎이 눈부시다. 아하, 그렇구나! 모든 납북자 가족의 염원을 담아 하늘이 노란 리본을 달아 줬구나!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