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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정책 축소·후퇴…“공약가계부 다시 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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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후암동 쪽방촌에 사는 김호태(68)씨는 3년째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내고 있다. 매달 들어오는 49만 원의 기초생활급여가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끈이다. 그나마도 월세와 통신비로 25만 원을 내고 나면, 남은 24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지난해 7월부터 노인들에게 기초연금 20만 원을 주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시행됐지만, 그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기초연금으로 20만 원을 받는 대신, 그만큼 기초생활수급액이 20만 원 깎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노인들한테 20만 원씩 준다고 해서 먹고 살기가 좀 나아질까 기대했는데…. 이렇게 줬다 뺐을 거면 기초연금을 준다고 하지나 말지.”

‘증세 없는 복지’를 내세웠던 박근혜표 복지 공약, 실제로 그 약속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중앙SUNDAY는 박 대통령의 주요 복지 공약의 진척 상황을 긴급 점검했다. 그 결과, 핵심 공약 중에 상당 수가 실제 추진 과정에서 후퇴하거나 표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게 노인복지 공약이다. 정부는 2004년부터 노인들을 대상으로 각종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월 급여는 20만 원에 불과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10년째 20만 원에 묶여있는 급여를 40만 원으로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관련 예산은 재정 여건을 이유로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헛 공약이 된 셈이다.

기초연금도 마찬가지다. 당초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지난해 도입 과정에서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10~20만원을 차등지급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그 결과 191만 명의 노인들이 기초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또 다른 노인복지 공약인 ‘임플란트 지원책’도 도입 과정에서 대상이 축소됐다. 새누리당 대선 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있는 변화’에는 65세 이상 노인이면 건강보험을 통해 수혜를 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지난해 제도가 도입되면서 75세 이상으로 혜택 대상을 줄였다. 건강보험 재정이 넉넉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나마도 어금니와 앞니에 한해 평생 2개까지만 건강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게끔 국한됐다. 손영래 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올해 하반기부터는 70세, 내년에는 65세 이상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고교 무상교육 공약은 공염불될 듯
#네 자녀를 둔 이모(43)씨는 올해 첫째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2년 전 고등학교도 무상교육을 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교육비 부담이 줄어들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입학금과 수업료, 책값에 벌써 60만 원을 썼다. 이씨는 “중학생 때랑 달리 고등학생은 교육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 놀랐다”며 “곧 둘째, 셋째도 고등학교에 갈 텐데 언제부터 무상교육을 한다는 기약조차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고교 무상교육 공약은 아직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무상교육 대상을 매년 25%씩 확대해 2017년에는 전면 무상교육을 완성한다는 게 박 대통령의 원래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올해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무상교육 예산은 세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액 삭감됐다. 이에 따라, 현 정부 임기 내에 고교 무상교육을 완성하기는 사실상 어렵게 됐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셋째 아이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정부에서 전액 지원하겠다는 ‘다자녀 장학금’ 공약도 도입 과정에서 축소됐다. 우선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가정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원 대상을 지난해 1학년에서 올해 1~2학년으로 확대했지만, 금액은 국립대 평균 등록금 수준인 연간 450만 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만 21세가 넘는 학생은 받을 수 없다.

“아이는 국가가 키워주겠다”며 내놓은 0~5세 무상보육 공약은 지난해부터 전면 시행됐다. 반면, 보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3~5세 누리과정(유아 보육·교육과정) 지원금을 인상하겠다는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당초 추진 계획대로라면 1인당 22만원이었던 지원단가는 지난해 24만원, 올해 27만원으로 인상됐어야 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올해에도 지원단가를 22만원으로 동결했다.
경남 하동군에서 민간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정모 원장(52)은 “정부 지원금이 오르지 않다 보니 보육교사 월급 인상은 물론 시설 개 ·보수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유치원에서는 학부모들한테 추가로 수업료를 더 받을 수 있지만 어린이집은 현행 법제상 이마저도 할 수 없어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양적 팽창에 집중한 나머지 보육의 질을 높이는 데는 소홀히 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봉주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당초 공약대로 무상보육을 시행하면서 보육 서비스가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무상보육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다 보니 정작 질적으로는 나아진 게 없다”며 “전반적으로 보육의 질이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부모들이 그나마 여건이 좋은 국공립 시설로만 더 몰리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보육서비스의 내실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4대 중증질환 ‘반쪽공약’ 논란
핵심 보건의료 공약인 4대 중증질환(암ㆍ심장ㆍ뇌혈관ㆍ희귀 난치) 보장성 확대 방안 역시 애초 약속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대선 공약집에 따르면, 정부는 75% 수준인 4대 중증질환의 보장률(비급여부문 포함)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2016년에는 모든 진료비를 100% 건강보험이 적용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복지부 측은 이를 통해 2012년 1조119억원에 달했던 4대 중증질환 비급여 환자 부담이 올해 1543억원으로 85% 가량 줄어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책 입안과정에서 정작 중증질환 환자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3대 비급여(상급 병실료ㆍ선택 진료비ㆍ간병비)는 아예 대상에서 제외돼 ‘반쪽짜리 공약’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김진현 서울대 교수(간호학과)는 “정부에서 뒤늦게 상급 병실료 개선 등 보완책을 내놨지만 간병비 대책은 여전히 빠져있어 임기 내에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주거 복지 공약인 ‘행복주택(공공 임대주택사업)’ 건설은 추진 속도가 더딘 상태다. 박 대통령은 철도부지 등 노는 땅을 활용해서 싼값에 임대주택을 보급하겠다며 행복주택 공약을 내놨다. 당시 20만 채 건설을 약속했지만, 추진과정에서 목표치가 14만 채로 낮춰졌다. 그나마도 지금까지 사업 승인이 완료된 가구는 1월 현재 총 2만7000여 가구에 불과한 실정이다.

구멍난 공약가계부…국세 11조 펑크
박 대통령의 복지 공약에 차질이 빚어진 건 정부가 공약 이행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3년 5월 증세 없는 복지를 실현하겠다며 ‘공약가계부’를 제시했다. 세입 확충과 세출 절감을 통해 공약 이행에 필요한 135조원의 예산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경기 침체 등의 여파로 인해 공약가계부는 지난 2년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세출을 깎기는커녕 세수 결손, 즉 목표보다 덜 걷은 세금이 11조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가계부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최종찬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은 “사회간접자본(SOC) 등 세출을 조정해 재원을 조달하려는 계획이 경기부양대책 등으로 세출이 오히려 늘어났고, 지하경제 양성화도 예상보다 실적이 적었다”며 “공약가계부에 의한 재원 조달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으로 판명됐다”고 말했다.

윤희숙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세입과 세출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 증세를 하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라며 “비효율이 누적된 복지 지출을 포함해 전면적인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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