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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잡스 꿈꾼 연구원, ‘차고’ 만들어준 대기업 … 세계 첫 ‘끈 배터리’ 결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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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사람의 아이디어는 집단 지성을 만나 의외의 결과물을 만든다. LG화학 연구원들이 합심해 만든 케이블 배터리는 구부리거나 묶을 수 있다. [사진 LG화학]

LG화학 기술연구원의 김제영(43) 박사는 고민에 빠졌다. 2008년 7월 아이폰 3를 공개하는 스티브 잡스의 발표를 보면서다.

‘미래 정보기술(IT) 기기는 어떻게 변할까’. 고민은 꼬리를 이었다. ‘내가 만드는 배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이어폰이 눈에 들어왔다. 무릎을 쳤다. ‘이어폰 줄처럼 배터리를 얇게 만들면!’ 처음엔 혼자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 벽에 부딪혔다. 그대로 썩히긴 아까웠다. 그는 연구소 내 열린 게시판인 ‘아이 포럼’에 아이디어를 올렸다. 회사의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6명의 동료 연구원이 팔을 걷고 나섰다.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연구는 속도를 냈다. 김 박사는 2012년 재료공학 분야의 세계적 학술지인 ‘어드밴스트 머티어리얼스’에 논문 하나를 실었다. 세계 최초 케이블 배터리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 글로벌 스포츠 의류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개발비는 얼마든 대줄 테니 신발 끈이나 옷 같은 형태로 같이 만들어보자.”

작은 삼성, 작은 LG 만드는 ‘들이대 정신’

김제영 LG화학 기술연구원 박사(앞줄 가운데)와 연구팀은 신발끈, 벨트, 옷의 형태로 진화하는 배터리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 LG화학]

 연구팀은 이때부터 하나의 작은 기업이 됐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의 시발점이었던 ‘차고(車庫)’가 LG화학 안에 차려진 셈이다. 빌 게이츠조차 “누군가 지금 차고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할 정도였다. LG화학 ‘차고’에서 만든 길이 30㎝, 두께 1.5~2.5㎜의 전선처럼 생긴 배터리는 내년 시장에 나온다.

 대기업 안에서 새로운 기업가 정신이 자라고 있다. 조직을 기반으로 강력한 리더십과 발 빠른 실무자가 뭉쳐 오늘의 대기업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자발적인 개인의 창의성이 아래로부터 위를 자극한다.

기업 내부(Intra)의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인 ‘인트러프러너십(Intrapreneurship)’ 시대의 개막이자 ‘한강의 기적 3.0’을 향한 도약이다. 컨설팅업체 아서디리틀의 홍대순 부회장은 “소니·노키아 같은 몰락한 거대 공룡과 창업 초기의 활력을 잃지 않은 애플·페이스북의 차이가 바로 사내 기업가 정신”이라며 “지속적인 내부 혁신을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기업 내 활력이 소니·페이스북 차이 갈라

 삼성전자는 ‘C랩’이란 사내 벤처 프로그램에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든지 기존 업무를 그만두고 꼬박 1년을 C랩에서 보낼 수 있다. ‘큰 삼성’에서 할 수 없는 일이 ‘작은 삼성’에선 자라고 있다. 헤드셋 없이 피부를 통해 소리를 전송하는 신개념 스피커, 스마트폰으로 입력하면 포스트잇으로 출력되는 프린터 등을 개발했다. 배수환 선임연구원은 “협업을 이끌어낸 밑바탕은 뭐든지 해보겠다는 ‘들이대 정신’”이라고 말했다.

 사내 기업가 정신은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선순환한다. 대기업이 숙주가 돼 기업 생태계 전체를 살찌게 한다는 얘기다.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은 삼성SDS의 사내 벤처 1호 출신이다. 이런 네이버는 최근 ‘자기 복제’를 시작했다. 지난 4일 웹툰과 웹소설셀을 기업 속 기업(CIC)인 사내 독립 기업 1호로 정했다. 리더에겐 대표 직함도 주고 실질적 경영권도 넘겼다.

김상헌 네이버 대표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가능성 있는 서비스에는 더 큰 길을 열어주려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영훈·함종선·손해용·김현예·박수련 기자 filic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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