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유 칼럼] 대학 총장이 안 보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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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30면

대학 총장이 권위의 상징인 적이 있었다. 국립대 총장을 정부가 임명하던 1980년대 총장들이 모이면 차량 끝 번호가 ‘1111’인 검은색 고급 관용차가 즐비했다. 부산대 총장은 ‘부산 1가 1111’, 경북대 총장은 ‘경북 1가 1111’ 같은 식이었다. 그때 총장들은 대학 발전에 대한 고민보다는 권세를 하사한 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사립대 총장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재단에 잘 보인 이들이 총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학생은 4년 내내 총장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다. 총장이 독선적으로 학교를 운영해도 교수와 직원들은 ‘노’라고 못하고 몸을 사렸다. 폐쇄적·종속적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 상아탑의 자화상이다.

수평적·민주적 대학 운영이 필수인 요즘 총장은 고달파졌다. 대학에 총장 아닌 교수가 ‘부총장’ 한 명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교수 개개인이 간섭받기 싫어하는 독립적인 전문가여서 이끌고 가기 힘들다는 얘기다. 학내 문제 해결해야지, 학생 모집 신경 써야지, 발전기금 모아야지, 정부 지원사업 따와야지, 교육 관료에게 밉보이지 말아야지…. 어느 대학 총장의 넋두리다.

그렇더라도 총장의 무게는 여전하다. 학식과 덕목을 갖춘 캠퍼스의 어른이자 구성원 수만 명을 이끄는 리더다. 특히 지식을 생산하고 나누고, 후학을 양성해 국가에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과 책임은 더 커진다. 누가 총장이 되느냐에 따라 대학의 미래, 더 나아가 국가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다.

미국 하버드대의 데릭 복(Derek Bok)은 직업이 총장인 ‘하버드의 전설’이다. “대학의 성공 비결은 자율”이라며 총장 재임 20년간(1971~91) 행정조직 구조조정과 성차별 입시정책 폐지 등 많은 개혁을 일궜다. 2006~2007년에도 후배 총장이 교수진과의 갈등으로 중도 하차하자 총장대행을 맡을 정도로 경영능력·학식·인품을 두루 갖췄다. 우리 대학은 총장 임기가 대부분 4년이다. 일부 오너 총장을 제외하면 능력을 인정받아 연임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총장은 대부분 간선제로 뽑는다. 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직선제로 전환됐다가 학내 분열, 선거 시비 등으로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대학사회의 자업자득이다.

올해도 총장이 많이 바뀐다. 전국 200개 4년제 대학 중 50곳이 넘는다. 고려대(염재호)·성균관대(정규상)·한양대(이영무)·아주대(김동연) 등이 새로 뽑았고 동국대·인하대 등 여러 곳이 인선 중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들린다. 동국대는 총장 후보인 보광 스님의 논문 표절 문제로 내홍이 심하고, 인하대는 재단의 독단적인 선임설에 술렁인다. 선출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데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지 걱정된다.

더 염려되는 것은 총장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2017년부터 고교 졸업자 수가 급감해 대학 구조조정이 발등의 불이다. 교육부는 각종 재정지원 사업을 내걸고 대학에 정원 감축 등 획일적인 구조조정을 압박한다. 수도권과 지방, 사립대와 국립대의 환경 차이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다. 대학 입시는 누더기처럼 바뀌고 또 바뀐다. 교육부가 대학에 의견을 물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쓴소리하는 총장이 없다. 4년제 대학 총장의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나 사립대학총장협의회도 “고등교육 국가 경쟁력 제고에 정책 초점을 맞춰 달라”는 원칙론만 우물거린다. 정부의 평준화 정책을 ‘교육 역주행’이라며 비판했던 서강대 손병두 전 총장이나, 공과를 떠나 개혁을 이끄느라 시끌시끌했던 KAIST 서남표 전 총장 같은 분들이 없다. 정부와 교육 관료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무니 스타총장이 나오기는커녕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총장들이 몸을 사리면 시대의 지성이 없는 것이나 같다. 데릭 복 전 하버드대 총장처럼 대학 자율화와 인재 양성 방식에 대한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총장이 욕먹는 걸 두려워하면 대학이 죽는다.

양영유 사회에디터 yangy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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