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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9)재입교 좌절-제79화 육사졸업생들(25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25가 터진 후 친형처럼 돌봐주며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생도1기생들이 7월10일 대전 원동국민학교에서 소위로 임관돼 훌쩍 떠난 뒤 생도2기생들도 곧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송됐다. 생도 2기생들은 대구에서 미8군사령부의 경계임무를 수행하게되었고 이중 30여명은 다시 포항의 3사단 주둔지로 옮겨져 역시 사단사령부의 경계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8월15일, 부산 동래에서 창설된 종합학교에 곳곳에 흩어졌던 생도 2기생들이 다시 소집돼 후보생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모여든 2기생은 고작 1백75명뿐이었다. 3백30명중 53%에 불과한 숫자였다.
나중에 파악됐지만 첫 전투인 포천·불암산 광나루 전투와 포항 전투에서 무려 90명의 2기생들이 희생된 것이었다.
이들은 종합학교에서 소위로 임관된후 전선에 투입돼 다시 47명이 전사하게 된다.
당시 육본은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정식으로 폐교하고 생도2기생과 경기도 시흥의 보병학교출신 간부후보생, 그리고 각병과출신 후보생들을 주축으로 종합학교의 문을 연 것이다. 동래종합학교는 맨 처음 육군제병학교라는 간판으로 시작되었다가 곧 보병학교로, 보병학교는 다시 종합학교로 개칭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9월5일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을 가졌다.
6주 훈련기간으로 된 종합학교는 52년 진해에서 육사가 다시 발족될 때까지 32기에 걸쳐 6천여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동래에 당도한 생도2기생들은 편의상 종합1,2기생으로 나뉘어 종합학교에 편입되었다. 1931년생을 기준으로 그 이상 연령자는 하사관 출신 생도들과 더불어 종합1기생으로, 그 이하 연령자는 종합2기생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생도2기생중 종합1기는 김의향(예비역대령 대한통운부장) 김홍내(예비역 대령) 이공녹(예비역중령·명지고교사) 조병봉·한기욱(예비역대령)씨등 23명이고 종합2기는 현역중장인 장정렬장군·김용진장군등론 1백52명으로, 1백%가 생도2기로 충원되었고 이들은 모두 9사단의 창설요원이 되었다.
서울철수때 함께 철수하지 못했던 생도2기생들은 뒤늦게나마 종합학교에 편입, 10기에 3명, 15기에 9명등 모두 12명이 더 배출되었다. 수송사령관을 지낸 김성진씨(예비역 소장·전국버스공제조합이사장)도 종합 15기 출신이다.
종합학교를 거친 생도2기생들을 병과별로 보면 보병이 가장 많은 1백10명이고, 다음으로 공병이 41명, 포병이 13명의 순이었다.
생도2기생중 공병출신에서는 한상우(예비역소장 전공병감 재향군인회사업국장) 홍오(예비역소장 개인사업)씨등 2명의 장성이 배출됐다.
생도2기생들이 종합학교를 나와 소위로 임관돼 전선에서 한창 활약하고 있던 51년12월, 육본은 생도2기생 출신 장교 전원에게 태능 육사입교당시의 교번과 현직 소속등을 알리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는 다음해인 52년 진해에 육사 재발족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부분 중위계급장을 달고 있던 생도2기생들은 이 전문을 받고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방황했다고 한다. 당시 손완직중위는 생도시절 육사교장이었던 이준직소장(당시 국방부 총무국장) 을 찾아가 이 전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옛제자를 만난 이장군은 이자리에서 『다음 해에 사관학교를 다시 열게되는데 생도2기생들의 근황을 파악해서 이들을 사관학교에 재입교시키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그럴 경우 『생도2기생들은 육사에 재입교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손중위는 『제가 생도2기생의 대표자격은 아니지만 지하에 묻힌 동기 전우의 영령과 생존해 있는 동기생들의 총의를 대변해 말씀드리겠읍니다』고 전제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만일 군이 한없는 관용을 베풀어 생도2기 출신 장교들에게 육사 재입교의 은전을 베푼다면 서슴지 않고 현재의 장교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사관학교에 입교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생도2기생들의 육사 재입교의 길은 영영 열리지 않고 말았다.
당시 육본 수뇌들이 이들의 불운한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재입교계획을 백지화한 것은 ▲세계전사에도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직 중위를 또다시 사관생도 신분으로 끌어내릴수 없고 ▲술 담배등 이미 세상 풍속맛을 본 장교들을 재교육시킬 경우 통제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규율이 엄격한 육사의 전통수립에 자칫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던 것로 기억된다.
하여튼 이처럼 복잡한 사정으로 생도2기생들은 육사10기(생도1기)와 11기(정규1기)사이에 끼이지도 못하고 미아신세가 되고만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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