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88세 청년'] 2. 기차 통학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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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홉 살 무렵 어머니(유태순)와 함께 개성 생가에서 찍은 사진. 왼쪽은 누나 민정식. 나는 어릴 때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요즘도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사진을 찍어 앨범에 보관한다.

나는 1918년 5월 3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민영필)는 한학을 공부한 개성 지방의 유지로서 슬하에 2남 1녀를 두셨다. 나는 그 중에 막내로서 형은 중산(重山) 민완식, 누이의 이름은 민정식이었다.

나는 포은 선생의 핏자국이 있다고 해서 유명한 선죽교와 이웃한 원정보통학교를 다녔다. 대단한 개구쟁이였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얼굴 빛이 무척이나 검었다. 학생들이 물었다. "선생님, 고향이 어디십니까?" 나는 선생님께서 대답하기도 전에 냉큼 "인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가 미움을 샀던 기억이 있다. 개구쟁이였지만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조선 팔도의 수재가 모인다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입학원서를 내자 주변에서는 "무리"라며 걱정했다. 나는 거뜬히 합격했다. 이 무렵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다.

경성제일고보의 입학시험은 두 단계로 돼 있었다. 1차로 학과시험을 보고, 여기 합격하면 구두시험을 보게 돼 있었다. 면접인 셈이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구두'와 '구두시험'을 혼동하셔서, "관식이가 구두를 신어 보지 않아 낙방할지 모른다"며 크게 걱정하셨다고 한다.

시험에 합격한 날이었다. 나는 아껴두었던 여비로 시계를 사서 차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크게 노여워하셨다. 나는 기차통학을 하려면 반드시 시계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시계를 돈으로 물러와야 했다. 선친께서는 평소 절약과 검소를 생명처럼 여기던 개성 선비의 표상과도 같은 분이었다. 경성(서울)에서 공부하게 된 아들로 하여금 그 정신을 잊지 않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일제시대 사람들은 줄여서 경성제일고보로 불렀다.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이 학교는 76년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교사를 옮겼다. 옛 교사는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경성제일고보는 중.고교 과정을 4년에 마치도록 돼 있었다. 나는 32년 3월 입학해 5년 만인 37년 3월 4일 졸업했다. 졸업하기까지 남보다 1년이 더 걸린 데는 사연이 있다. 나중에 설명하겠다.

나는 개성에서 기차로 통학했다. 편도 두 시간이나 걸리는 긴 통학길이었다. 개성에서 경성의 광화문까지 직선거리는 60㎞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차가 역마다 섰기 때문에 운행시간이 오래 걸렸다. 개성역을 출발한 기차는 봉동~장단~문산~금촌~일산~수색~신촌을 거쳐 경성역에 도착했다. 경성제일고보 학생들은 경성역에서 내린 다음 전차로 갈아타고 안국동으로 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의 어머니께서도 매우 자애로우셨다. 개성에서 경성까지 기차로 왕복 네 시간. 그 먼 길을 통학하는 어린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길을 걸어 역까지 바래다 주셨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 먹이고 도시락까지 준비해서.

나는 짓궂었다. 졸업 때까지 시말서만 열두 번을 썼다. 그러니 학교에서 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수업을 받다가도 수틀리면 칠판에다 오색 구슬을 집어 던지곤 했다. 그러면 교사는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민관식이지!"하고 짚어냈다. 당시는 일제 식민시대. 교사가 일본인이라 나의 불량기와 반항심은 더 폭발한 것 같다. 4학년 때인 35년 5월 9일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여행 중 말썽을 피웠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기도 했다. 당시 찍은 단체사진에 나는 '뺌다구 맛든 그때를 추억하며(뺨을 맞던 그때를 추억하며)'라고 적어 놓았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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