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빠' 된 덕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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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정석희(72)씨는 9년째 손주를 기르고 있다. 처음엔 외손주 두 명이었다. 2006년 딸 둘이 50일 간격으로 손자들을 낳았다. 막내아들은 2010년과 2012년에 손자를 데려왔다. 이렇게 사내 아이 넷이 정씨 집에서 자랐다. 요즘도 그는 오전 8시 손주 둘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맡으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내 자식들이 애 보느라 회사 일 못할 생각을 하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어요. 애프터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돌아가며 근육통을 앓고, 부족한 잠에 치어 가며 9년 동안 손주를 기른 이유다.

 일종의 빚을 갚는 심정도 있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던 전형적인 7080세대의 아버지였다. 1998년 은행 지점장으로 명예퇴직하기까지 직장 다니는 동안 새벽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은행에서 30여 년 일했는데 아이들 크는 건 당연히 제대로 못 봤죠.” 그래서 대신 손주들과는 24시간 보내는 날이 많다. 마음속 어딘가 있던 빚을 이 시간 동안 갚는 심정이라고 했다. 정씨는 이런 내용을 엮어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란 수필집도 냈다.

 7080세대 ‘덕수’(영화 ‘국제시장’ 주인공)들이 ‘하빠’가 되고 있다.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빠 같은 할아버지가 ‘하빠’다. 자식의 사회 경력을 위해서, 또 젊은 시절 소홀했던 가정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육아에 뛰어들고 있다. 속속 출간되는 할아버지 육아일기의 저자들은 대부분 젊은 날 치열하게 살았던 ‘덕수’들이다. 손주 셋을 기르며 『하빠의 육아일기』를 펴낸 신상채(65)씨는 전직 전주북부경찰서장이었다. 20년간 책 100여 권을 번역한 이창식(66)씨는 외손자와의 1년을 담아 『하찌의 육아일기』를 냈다. 이씨는 “아이를 품에 안고 토닥이며 노래를 불러주다 보면 가족의 사랑이란 게 이렇게 크고 따뜻하다는 생각을 한다”며 “바빴던 젊은 시절에는 잘 알 수 없었던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석희씨는 “젊은 엄마들은 육아 이론에 강하지만 우리는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유롭게 아이를 기른다”며 “독특할 정도로 복잡한 시대를 살았는데 농축된 경험을 손주와의 사랑으로 완성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지영·김호정·한은화·신진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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