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말 한마디 그렇게 어렵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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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34면

미국 살 때 느낀 건데, 좀 삐딱하게 말하면 이 사람들 참 “말은 번드르르하게 잘한다”. 애들 학교에서 행사만 있어도, 결혼식을 할 때도 남들 앞에만 나서면 어쩜 그리 개인의 소소한 일화와 상대방과의 관계를 일깨우는 예시와 함께 가슴 쿵 치는 은유적 추상적 표현 그리고 유머를 곁들이는 연설을 하는지. 스피치 쪽은 미국이 확실히 선진국이구나. 얄미웠던 사람조차 달리 보게 만드는 말의 힘을 그때 절감했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그 말 한마디

일반인이 그러니 유명인들임에랴. 만약 당신이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다면 당장 인터넷을 뒤져 코미디언 짐 캐리나 코난 오브라이언의 대학 졸업축사, 영화배우 엘렌 페이지의 커밍아웃 연설 등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한글 자막까지 다 달려있다.

짐 캐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유머 감각이 넘쳤지만 안정적인 회계사가 됐고, 그러나 실직해 가족을 고생시킨 이야기를 하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사랑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낫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과 유머의 힘을 목격했고 그것이 제 주변 세상을 변화시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바로 저거야! 저거야말로 내가 시간을 쏟을 가치가 있는 일이야!’라고.” 그러면서 가슴 찡한 한 마디로 결국 눈물이 핑 돌게 한다. “자신에게서 발산되는 빛을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하게 하세요. 당신의 찬란함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세요.”

‘사람이 똑똑해야지 말만 번드르하게 잘하면 뭐해?’ 나도 이 말이 옳은 줄 알았다. 회장 선거에 나가 말 한마디 똑바로 못하고 어물거리다 망신당하고 내려올 때까지. 부모 잃은 친구에게 쑥스러워 “얼마나 마음이 아프니. 하지만 네 사랑을 가슴에 품고 가셨을 거야”라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후회했을 때까지. 어쩌다 나간 방송에서 더듬거리다 눈총을 받았을 때까지. 커가면서 왜 ‘신언서판’에 말씀 언(言)이 들어있는지,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들을 때 얼마나 마음에 위로가 되는지, 진심을 담은 어록들에 기죽어있던 가슴이 활짝 펴지는지 깨닫고 조금씩 일부러라도 번드르르한 말을 늘려가고 있다.

말과 연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건 연초 잇달아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연설을 보면서다. 오바마야 이미 말 잘하는 능력 덕분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니 오죽하랴마는 볼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부자 증세의 필요성을 강조한 올해 연두 교서에서 그는 “풀타임으로 일하는데 1만 5000달러도 못 받고서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정말로 믿냐? 그렇다면 한번 그렇게 해보시라”라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우리 중 몇몇만 화려하게 성공하는 경제를 만들 건가 아니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회와 소득을 늘리는 경제를 만들 건가”라고 설득한다. 그의 연설은 적어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아 저 사람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그 역시 말만 번드르르 한 사람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최소한 번드르르한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바로 그때 열렸다. 하지만 거기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에 대한 고려만 있을 뿐, 우리가 ‘듣고 싶은 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하긴 1년에 한번 겨우 기자와 대중 앞에 서는 자리이니 그 목소리를 들은 것만이라도 고마워 해야 할 것인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보통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만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말을 남긴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어떤 말로 기억될까. ‘바쁜 벌꿀(꿀벌이 맞다)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 ‘이산화가스 산소 가스’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 이런 말만 기억에 남게 되는 것 아닐까 싶어 쓸쓸해진다. 괜히 말실수로 시비건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통령이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역사의 기록에 남는 자리다. 말 하나라도 정확하고 근거 있고 논리적으로 해야할 책임이 있다. 게다가 국민들은 그의 말을 관리하는 고위 공무원의 임금을 비싼 세금으로 내고 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우리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제발 번드르르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시길.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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