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군 유곡면 덕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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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유자광등 훈구파 대신들이 김일손등 사림파의 선비들을 무고하게 사사하고 귀양보낸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사건. 이때 사림파의 한사람이었던 표연말은 유배도중 숨지고 그의 6촌동생 표사명 (성종조·예조참의)은 경남의령군유곡면덕천리로 몸을 숨긴다.
거장산줄기 옥녀봉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가슴이 저리도록 차갑다. 50여가구 3백여명이 몽땅 한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다. 지금도 멀어야 10촌미만. 다른 지방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표씨문패가 집집마다 달려있다.
이 마을 표씨들은 조선조말까지 천석꾼의 부를 누리며 세도를 부렸다. 그러나 포사명의 14세손 표경준대에 와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마을 표씨의 흥망에 얽힌 일화 한토막
조선조말에 이르러서는 웬만한 벼슬은 돈만 주면 살수 있었다. 벼슬에 뜻을 둔 경준은 전답을 팔아 상경, 중앙정계의 모정승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폈다. 바둑도 둘줄 모르면서 정승과 돈내기 바둑을 뒀다. 그리고 바둑에서 질때마다 돈꿰미를 내밀었다. 그의 로비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정승은 별로 높지는 않으나 그런대로 쓸만한 자리 하나를 마련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승은 바둑을 두면서 지나는 말로 「선영현감의 사람됨이 어떠냐」고 물었다.
당신 선영현감은 대표적인 탐관오리였다. 때문에 경준은 서슴없이 『그 작자는 코묻은 어린아이 동전까지 긇어 모으는 악질』이라고 답했다. 이 한마디 대답의 잘못으로 그의 벼슬은 꿈은 좌절되었다. 훨씬후에 안 사실이지만 현영현감은 정승의 조카였다고 한다. 경준이 이때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표성재씨(63·표씨대종보편집인)가 들려주는 사랑방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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