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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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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사회2부장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우리 사회를 덮쳤다면 2015년은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강력 사건으로 시작되고 있다. 양양 방화 살인, 안산 인질극, 인천 어린이집 폭행, 아현동 주택가 살인. 맥락 없는 사건들로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①“나도 피해자다. 막내딸 죽을 때 경찰이 나를 흥분시켰다.” 안산 인질극 범인 김상훈은 경찰서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②“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다. 폭행은 아니었다.” 어린이집 교사 양모씨는 자신이 아이를 쓰러뜨리는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③“그 여자가 (뇌성마비인) 내 아들을 두고 욕설을 했다.” 빚 1800만원 때문에 이웃 가족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살해한 양양 방화범 이모씨도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같이 자신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이고 뭔가 억울하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스스로를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을 감독했던 의사들도 자신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충실했다고 확신했다.(『타고난 거짓말쟁이들』) 하지만 확신하는 것과 그 확신을 입 밖에 꺼내는 것엔 차이가 있다. 김상훈과 양씨와 이씨처럼 범인들이 연이어 뒤틀린 속마음을 발설한 적은 많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자기기만쯤은 멋지게 해낼 수 있어야 먹이사슬의 위쪽에 설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데 있다. 얼마 전 만난 한 검사는 ‘땅콩회항’ 사건으로 구속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해 “검찰 조사실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말 담대하다던데요. 그 정도는 돼야 대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자녀의 성공을 원하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에 가깝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거리낌 없이 적어 낼 줄 알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봉사도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활동이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계층 상승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甲)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

 뉴스를 틀어보라. 궁중(宮中) 깊은 곳에 권력투쟁의 돌풍이 스쳐갔다. 그 결과 검찰 수사의 독립성이란 소중한 공적 자산이 소모되고 말았다. 대통령은 오히려 국민들 앞에서 “바보 같은 짓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된다”고 훈계했다. 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청와대 행정관의 ‘K, Y 배후설’이 불거졌다. 그런데도 부끄럽다고,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이런 일들이 지난해 세월호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 업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국가의 무능과 자본의 탐욕을 자각하고, 반성하고, 개혁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기를 날려버렸다. 바닷속 객실에 갇혔던 아이들을 ‘사고 희생자’의 틀에 또 한 번 가뒀고, 세월호를 사회 갈등의 먹잇감으로 던졌다.

 2015년의 사건들은 세월호와 인과(因果)의 끈으로 묶여 있진 않더라도 최소한 겹쳐져 있다. 부끄러움의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한 사회에서 항용 나타나는 현상이요,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자기기만의 시스템을 더 높이 쌓아올리는 것인지 모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철학자의 물음은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하루 비관론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를 다시 대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언저리를 맴돌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권석천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