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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국제시장에는 미생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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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제가 아는 40대 초반의 사회학자 한 명이 있습니다. 최근 나이 드신 아버지와 함께 영화 ‘국제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관람이 끝난 뒤 소주 한잔을 했는데 아버지는 내내 영화 얘기를 했습니다. “주인공 인생이 나와 같다”고 누누이 강조했다고 하네요. 그의 아버지는 소년기에 한국전쟁을, 청소년기에 4·19와 5·16을, 청년기에 베트남전을, 장년기에 광주민주화운동을 각각 겪었습니다. 아들은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산업화·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아버지의 격정 토로를 처음에 고분고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같은 얘기가 반복되자 한마디 ‘반격’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저희 세대, 제 아들 세대도 충분히 힘들거든요.”

 국제시장 세대가 온갖 역사의 굴곡을 몸소 겪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이겨내고 경제성장을 일구어낸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세대가 보기에 다음 세대의 고단함은 약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생각은 다릅니다. 드라마 ‘미생’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마치고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합니다. 소득과 자본 앞에 절망하는 세대입니다. 그 사이에 낀 장년층은 언제 일터에서 퇴출될지 모르면서도 쌓아놓은 재산은 많지 않은 불안 세대입니다. 절망·불안 세대 모두는 과도한 입시경쟁과 사교육을 받은 세대이기도 합니다. 이들 세대에게 국제시장 세대의 고단함은 희석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9일 KAIST 미래전략대학원 주최로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발제자는 40대 연구자(박성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사)였습니다. 박 박사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긍정적으로 보는 응답이 27%, 둘 다 부정적으로 보는 응답이 37%였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세대 간 격차가 뚜렷했는데요, 60대는 48%가 긍정-긍정으로 답변한 반면 부정-부정은 25%였습니다. 20대는 긍정-긍정이 16%에 불과한 반면 부정-부정이 48%에 달했습니다. 같은 시대·공간에 살고 있지만 두 세대의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박 박사는 청년층(20~34세)을 대상으로 바라는 미래상도 설문조사 했습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23%인 반면 ‘붕괴, 새로운 시작’ 응답이 42%였습니다. 국제시장 세대가 소중히 받들어왔던 ‘경제성장’이 1위 자리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붕괴, 새로운 시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박 박사의 발표가 끝나자 청중은 술렁였습니다. 청중의 상당수는 60대 이상이었습니다. 국제시장 세대의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붕괴 선호 42%, 맞는 겁니까.”

 “경제성장 가치가 그렇게 낮다니요?”

 질문을 넘어 반박을 하는 국제시장 세대도 적지 않았습니다. “젊은 층이 붕괴의 미래상을 갖고 있더라도 기성세대가 이를 바로잡아줘야 한다”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세대가 안타깝다”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미생 세대의 인식을 발표한 ‘낀 세대’ 박사는 “세대 간 인식과 가치가 다름을 보여주는 조사였지,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지만 상당수 국제시장 세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토론회 내내 듣고만 있던 미생 세대 한 명(KAIST 대학원생)을 만났습니다.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하더군요.

 “답답해서 발언하기가 싫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의 관객이 1000만 명을 돌파하던 날,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는 국가통계가 나왔습니다. 미생 세대도 충분히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국제시장 세대는 온갖 역경을 겪은 만고생(萬苦生) 세대이자 경제성장 세대입니다. 미생 세대는 헛수고라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생고생(生苦生) 세대이자 탈(脫)성장 세대입니다. 국제시장과 미생의 틈을 어떻게 메울까요. 미래한국의 가장 큰 해결과제 목록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