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정교육의 부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느날 한 청소년 상담실에 키가 훤칠하고 다부진 몸매의 아버지가 키가 작고 가냘픈 중1남학생을 데리고 들어섰다.
국민학교 때는 공부를 잘하던 아들이 중학에 진학하고부터는 나날이 성적이 떨어지고 요즘은 야구붐으로 끼니 조차 잊은채 밤늦도록 동네아이들과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는 하소연 했다.
아버지가 얘기하는 동안 아들은 몹시 위축되고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상담자는 분리상담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영해를 얻은 뒤 아들과 상담했다.
『야구가 배고픈걸 잊을 만큼 신나고 재미있었니?』
『아니요.』
『그렇다면?』
『선생님, 비밀 지켜 주실 수 있어요?』
『그럼』
학생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 되더니,『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우리 아버진 짐에 오시면 웃으시는 적이로 없어요. 어머니한테도, 저한테도, 동생한테도 명령만 하셔요.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셔요. 전 아버지가 무서워요. 집이 싫어요.』 이것은 상담실 장애 비친, 가족 사이의 대화단절로 빚어진 한 상담사례다.
몇 해전엔 부유한 집안의 한 고등학생이 무비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아버지한테서 꾸지람을 들은 뒤 프로판 가스통을 틀어 놓고 자살을 기도, 충격을 준 일도 있다.
오늘날 가정교육은 행방불명 됐다는 소리가 높다. 중병을 앓고 있다고도 한다.
지난 10여 년간 청소년 선도사업으로 뛰어온 안재정목사(한국기독교청소년선도회장)는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서 다음사항을 잘 지키라고 충고한다.
첫째, 부모의 역할을 돈으로 대행시키려하지 말라. 수많은「부모 있는 고아」에게 돈보다 사랑과 이해가 필요하다.
둘째, 자식을 믿지도 말고 의심치도 말라. 특히 귀가 시간은 본인 모르게 가끔 체크해 암시적으로 시정해 줘라.
세째, 부드러운 사람과 엄격한 사랑을 조화시켜라. 특히 꾸지람에 대한 훈련이 안된 경우, 한번 책망에 실의와 좌절이 크다.
네째, 자식의 학교성적이나 용모를 가지고 우열을 논하지 말라.「나를 낳고 후회한다」는 인상을 줘선 안 된다.
다섯째, 비행의 전조는 빨리 발견하고 조기 치료하라. 비행의 원인은 전적으로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러나 과연 현대가정이 얼마만한 교육력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가정의 구조가 핵가족화하면서 옛날의 대가족 시대에 비해, 특히 교육적 기능이 약화됐고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모의 생활방식·사고방식이 급격히 그 힘을 잃었다.
한 학생의식조사 결과『나는 부모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라는 물음에『아니오』라고 응답한 학생은 무려 59.3%나 됐다. 이는 부모가 학생들에게 삶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나 도덕적 훈련보다 TV에서 제공하는 각종 정보에 더욱 예민하다.
안인희교수(이화여대)는 현대 가정교육의 문제점으로서 우선 가정이 제공해야할 안식처로서의 기능이 위협받는 점을 들었다. 소가족의 부부 사이에 애정이 없거나 식은 상태가 계속될 때 대가족제에서 가능했던 완충역할이 어려우며, 부모와 자식간의 마찰도 예전의 할아버지·할머니가 맡던 푹신한 쿠션역할을 찾을 수 없다.
부부가 모두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 안식처 기능은 더욱 약화될 위험이 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구실하에 배금주의·출세주의 와중에서 부모들은 현실적인 욕구불만을 풀기 위해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가정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며, 가정이 있는 한 가정교육은 모든 교육의 기반이 돼야한다. 이제 상실돼 가는 가정교육의 실천력을 복원하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