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국민정서로 나라를 다스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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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베버식 표현을 빌리면 노무현 대통령은 줄리어스 시저적, 국민투표적(plebiscitarian) 성향의 대통령이다. 그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국민참여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 신세대의 다분히 정서적인 촛불시위에 크게 힘입어 당선됐다. 그가 대선에서 노조의 지원도 비밀문서로 약속받았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그런 노 대통령이니 국민정서의 기치를 들고 한창 고조되고 있는 삼성 압박의 대열에 가담한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파장은 두고두고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러 가지 이상징후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금산법(금융산업구조개선법)에 대한 삼성그룹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도 국민정서에 어긋난다고 말하여 결과적으로 여당과 시민단체들이 집요하게 벌이는 삼성 때리기의 화염에 기름을 부었다. 대통령이 도깨비불같이 실체 불명의 국민정서를 법 위에 올려 놓는 발언을 해버리면 이 나라의 법치는 어디로 가는가.

국민정서는 다수의 힘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정부의 합리적인 결정이 국민정서나 지역정서로 무장한 다수의 힘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불상사를 너무 많이 목격했다. 그런 일을 보고도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권과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치만 살핀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 한국 사회에는 법과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월터 리프먼이 반세기 전에 한 경고의 정확성에 전율을 느낀다. "중론(衆論)이 정부를 좌지우지하면 권력의 기능에 병적인 혼란이 일어난다. 중론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선의 변경에 거부권과 같은 작용을 한다." 리프먼은 비전만이 국민정서를 정리하여 체계에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건전한 공론(公論)과 구별되는 중론을 이용한 정치의 선수다. 감각적인 어휘의 구사로 사람들의 가슴에 쌓인 불만을 적절한 시점에 터뜨려 내는 언어의 마술사 같다. 대통령이 사회의 건강한 기풍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해버리면 청와대 참모진이 나서서 대통령 발언의 진의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명을 해도 발언의 파괴력은 크게 약화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좋은 말도 아끼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법치주의를 흔들고, 포퓰리즘을 선동하고, 서울대.삼성.강남같이 이른바 잘나간다는 집단의 이해가 걸린 이슈의 입법.수사.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발언에서랴. 시장의 승자를 눌러 패자를 돕는 방법은 승자와 패자를 동반 추락시키고 나라의 경쟁력을 잃게 한다.

노 대통령의 무엇이 문제인가. 그의 정치의 지평이 너무 좁아 보인다. 그는 자신의 당과 계층과 지지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정객(politician)에 머물고 있다. 정권 재창출에 너무 집착한다. 윈스턴 처칠이 왜 위대한 정치가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의 큰 그릇이다. 리프먼은 말했다. 처칠은 정적에게 무서운 분노를 가져도 소인배의 악의가 아니라 훌륭한 전사(戰士)의 기사도가 담긴 분노다. 한국은 영국이 아니고 노무현은 처칠이 아니다. 시대가 다르고 정치문화가 다르다. 한국의 좋은 대통령이 되는 데 처칠이 될 것도 없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도 대통령인 이상 정객의 틀을 벗어나 정치가(statesman)의 최소한의 기준에는 맞아야 한다. 정객과 달리 정치가는 긴 안목을 가지고 정권이 아닌 국가 차원의 정책노선을 편다. 대통령은 시민운동가가 아니다. 작은 지역 이익에 매달린 국회의원도 아니다. 그는 시장의 승자와 패자를 함께 아우르는 한국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 국민정서는 편승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체계로 걸러 내라고 있는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