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함께 가오’ 남편에게 간 70% 떼어준 70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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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사랑은 금실(琴瑟)로 비유된다. 부부애가 거문고와 비파의 어울림과 같다는 뜻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평범한 시골 노부부의 소소한 일상에 울고 웃었다. 영화는 백년해로(百年偕老)의 모습을 꾸밈없이 담았다.

하지만 부부가 귀밑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기 위해선 건강이 따라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마주 보는 ‘건강 거울’이다. 매일 서로의 안색을 살피고, 식생활을 함께 하거나 스킨십을 통해 건강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중앙일보의 건강 화두는 ‘부부의 사랑’이다. 배우자에 대한 관심은 질병도 예방하지만 죽음의 벼랑에서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건강한 당신’은 지고지순한 헌신과 사랑으로 백년해로를 이어가는 어느 부부의 건강 이야기로 새해를 연다.

70을 훌쩍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간 이식수술에 성공한 백지용(오른쪽)·정민소 씨 부부. 의료진은 사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신동연 객원기자]

경기도 일산에 사는 백지용(77)·정민소(78)씨 부부. 백씨는 부인 정씨로부터 2012년 4월 간을 이식받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백씨가 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06년 5월. 간과 전립선에 콩알만 한 암 덩어리가 발견됐다. 백씨는 바로 간 절제술과 그해 여름 전립선암 방사선 치료를 받고 완쾌됐다. 그후 5년간은 이상이 없었다. 모든 암이 완치된 듯했다. 그러던 중 백씨는 2011년 받은 검진에서 간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천벽력이었다. 70을 훨씬 넘어선 백씨는 치료를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간 절제 경험이 있었기에 색전술을 받았다. 간 종양에 영양을 공급하는 동맥을 찾아 항암제를 투여한 뒤 혈관을 막아주는 치료다.

다 나은 듯했던 간암은 이듬해 다시 재발했다. 6개월 시한부 선고도 받았다. 백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간이식 외엔 방법이 없었다. 간 공여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들·딸이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간염 병력 때문이었다. 간이식 시 공여자는 간염 흔적만 있어도 이식할 수 없다. 그러자 부인 정씨가 공여자로 나섰다. 하지만 의료진은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의학적으로 간 공여자 연령은 55세 이하로 제한돼 있다. 당시만 해도 실제 간 공여자 최고령은 48세였다. 고령자는 간 채취 시 위험할 뿐만 아니라 성공해도 회복이 어렵다.

“한 날 한 시에 가기로” … 부부의 다짐

정씨는 의료진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식하다 잘못되더라도 홀로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씨는 “우리 부부는 서로 한 날 한 시에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왔다”며 “사랑하는 남편을 그냥 눈 뜨고 보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자식들이 만류했다. 딸 백씨는 “잘못하면 부모님을 모두 잃을 수 있었기에 지켜볼 순 없었다”고 말했다.

의료진과 가족의 반대에도 정씨의 의지는 완강했다. 의료진은 고심 끝에 정씨의 이식 적합성 검사를 진행했다. 간·심장·폐기능을 면밀히 살폈다. 사실상 이식이 불가하다는 구실을 찾으려던 검사였다. 근데 몸 상태가 수술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의료진은 조심스러웠다. 간의 70%나 떼어주는 수술이었다. 여성이 공여자일 경우 두 명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백씨는 오롯이 정씨에게서만 받는 수술이었다. 끝내 정씨 고집으로 이식수술이 진행됐다. 간을 채취하는 데 2시간10분, 이식하는 데 7시간이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식 후 면역력이 떨어져 대상포진이 따라왔다. 네 번이나 반복됐다. 멀쩡했던 눈에 대상포진과 함께 백내장이 생겼다. 간은 눈과 연관이 깊어 간이 안 좋으면 안질환이 동반되곤 한다. 이식 후 백씨가 정씨의 몸을 돌봤다. 정씨는 “수술 후 5개월가량은 누워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컸다”며 “하지만 사랑으로 선택한 일이고 사랑이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랑의 힘

정씨의 간 공여 연령(76세)은 세계 최고령에 해당한다. 백씨의 이식수술을 집도한 국립암센터 김성훈 장기이식실장은 정씨 사례를 미국이식학회에 보고했다. 이 논문이 담긴 ‘미국이식학회지(American Journal of Transplantation)’가 올해 발간됐다. 김성훈 실장은 “정씨는 간 공여자 중에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세계 최고령”이라며 “이 사례를 외국에서는 믿지 않는다. 그만큼 위험할 수 있는 이식이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표현하고 함께하는 삶

백지용·정민소 씨 부부의 결혼 당시(왼쪽)와 30년 전 속리산 문장대 산행 시 모습. 이들 부부는 젊은 시절에도 같은 취미를 즐기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왔다.

이식수술 후 부부의 삶에는 변화가 생겼다. 일상에서 함께하는 일이 많아졌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수술로 약해진 몸을 추슬렀다. 백씨가 부인 정씨를 직접 챙겼다. 둘이서 먹는 식사는 백씨가 손수 차렸다. 백씨는 “이번 이식수술은 부인이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몸소 느끼게 된 큰 경험이었다”며 “수술 이후로는 나도 마음과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기력을 점차 회복하면서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도 함께 했다. 예전에는 운동을 함께 하는 일이 드물었다. 주로 정씨가 즐겼던 수영과 헬스를 백씨도 같이 즐기기 시작했다. 따로 다녔던 인근 스포츠센터도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찾았다.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에는 매일 아파트 단지 둘레를 산책했다. 백씨는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여가활동을 넓혀 갔다. 용기도 필요했다. 음치라 노래와 거리가 멀었던 백씨가 부인 정씨가 다니던 노래교실에 합류한 것. 교실에선 가장 앞줄에 앉았다. 이곳에서 배운 노래 실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노래방에서 뽐냈다. 이들 부부의 올해 목표는 스포츠댄스를 배워 함께 손을 잡고 플로어를 도는 것이다. 정씨는 “건강관리뿐 아니라 시간까지 공유하니 이제는 정말 부부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정씨의 이웃인 변정옥씨는 “원래 금실이 좋은 부부였지만 수술 후 더욱 돈독해졌다”며 “사람들이 다들 하늘에서 내린 부부라고 말한다”고 했다.

간이식을 집도한 의료진은 정씨 사례를 두고 ‘사랑의 힘’이라고 말한다. 김성훈 실장은 “나이로 보면 이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며 “두 사람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부 간 사랑의 힘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류장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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