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81>제79화 육사졸업생들(134)16인 하극상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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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송요찬 참모총장이 정군을 주도하다 구속된「8·8그룹」 (8기생 주동자8명)을 전원 석방함으로써 육본안에 술렁거리던 분위기는 일단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군 고위층에서는 육본의 8기생들을 ?개시킬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려 육본 근무 8기생 1백20명을 전방이나 하급부대로 방출, 분산시키기로 했다. 이른바 하방조치였던 것이다.
「8·8그룹」가운데 김종필·길재호·김형욱·신윤창·옥창호씨등은 그후 5·16 거사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했으나 최준명 (55·평북희천·대령예편) 석창희 (사망) 오상균 (평양· 중령예편·전감사원국장)씨등이 5·16주체가 못된 것은 이 소개방침으로 하방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육본 내에서 8기생중 유일하게 대령을 달고 있던 최준명씨의 경우 군수참모부 인사과장으로 있었으나 정군파동이후 5사단(사단장 채명신장군)참모장으로 나가야했다. 이런 하방조치로 점보참모부의 정보 전문요원을 빼고는 모두 뿔뿔이 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고 심각한 사건 하나가 8기생들의 「정군운동」과 박정희소장 주도의 「5·16거사」사이에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바 영관장교들의「16인 하극상 사건」이다.
「8·8그룹회 소동으로 송요찬 참모총장이 물러났으나 8기생들이 이른바 정군 대상자로 지목하고 있던 최영희 중장이 후임 참모총장으로 앉게되면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허정과도정부가 물러나고 민주당정부가 들어서자 정군파장교들은 장면총리에게「국방장관임명에 있어서의 고려사항」을 상신했다. 이들은 또 국방장관을 찾아가서는「육군참모총장의 임명기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등 정군을 향한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태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정군의 범위를 넘어 국군에 정치장교그룹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후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발전된 것은 사실이다.
장면내각은 곧 군부인사에 착수하여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중장(63·충북음성·군영출신· 현주일대사)을 임명하고 최영희 장군은 연합참모부총장으로 전보시켰다.
정군문재로 군부가 아직 시끄러울 때 최영희 연합참모부총장의 초청으로 미국방성 군원국장 「파마」대장이 내한했다.
그는 떠나는 날 뜻밖에 김포공항애서 한국군 중견장교들의 정군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의 「최영희·파마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으로 정군 움직임은 더욱 가열케 되었다.
당시 최경록 참모총장은『「파마」성명은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이에 대해 「파마」장군과 「매그루더」유엔군사령관이 해명을 곁들인 반박성명으로 응수함으로써 파문은 한미 군부의 대결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점점 더 커져갔다.
이무렵 5기와 8기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대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육본내 각 참모부의 영관급장교가 모두 모여 기별로 대표를 뽑아 최영희 연합참모부총장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영관장교 대표로는 8기를 포함하여 당시 대령이었던 5기생, 그리고 7기·8특·9기등 국군의 유력한 중견장교 그룹이 모두 망라됨으로써 정군운동이 8기에서 육사출신 영관급 장교 전체에게로 확산되고 격도 높아지는 과정으로 발전돼 나가고 있었다.
16명의 각기 대표들은 연합참모부총장실로 가서 최영희 장군에게「최영희·파마공동성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총장직 사퇴를 권유했다.
이 16명의 영관장교들은 곧 연락을 받고 달려온 헌병들에 의해 해산되고 이어 모두 징계위원회와 군재에 회부되었다. 이 16명은 그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법정투쟁을 해 김동복대령 외에는 전원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수사과점에서 「16인 하극상사건」의 배후가 드러났다. 즉, 정군을 주도했던 8기생들이 「16인 하극상사건」에도 주동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때문에 김종필·김형욱·석정선(대령예편·전 중정차장보·미국이민) 씨등 정군파의 본체가 드러나 김종필씨등은 옷을 벗게 되었다.
김종필씨는 5·16이 성공되자 다시 대령으로 복귀해 준장으로 예편했다. 석정선씨의 경우는 5·16이 나기전 61년3월에 예편했었다.
육군본부내「8·8그룹」중심의 정군운동은「16인 하극상 사건」으로 사실상 끝이 났으나 이 사건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는 교량역할을 했다.
『한국군사혁명사』는 『정군사건은 혁명 계획 편린의 극소한 일모로 이사건의 발생이 사직당국의 주목을 흐리게 하여 혁명준비는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정군문제의 종결은 5·16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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