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 남의 삶 베낀 30대 여성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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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헬스클럽에 운동하러 온 누군가가 떨어뜨린 소지품일 게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잠시 망설이다 슬그머니 봉투를 열어 본다.

 ‘OO여대 음악대학 최희진’.

 봉투에서 학생증이 나온다. 운전면허증·주민등록증도 보인다. 신분증 속 여자를 묵묵히 바라본다. 화사하고 맑은 여대생의 얼굴…. 2009년 여름, 서울 목동의 한 빌딩에서 주인 잃은 신분증을 주워 들고 밖으로 나온다.

 당신의 이름은 박미희. 그 뒤로 5년이 흘렀으니 이제 서른두 살이 됐다. 신분증은 방 안 어딘가에 보관해 뒀다. 아니, 보관이 아니라 은닉이라고 하자. 신분증 속 희진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으므로, 일부러 숨겼다고 말해야 옳다. 저 해맑은 여자 얼굴이 내 것이었다면…. 문득 희진의 삶을 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만뒀다. 무슨 수로 타인의 삶을 탐할 것인가.

 2014년 11월의 어느 날. 방 청소를 하던 중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왜 그것이 손에 닿게 됐을까. 5년 전 주워서 어디에 둔 건지도 잊어버렸던 희진의 신분증이. 신분증에 새겨진 희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화사한 희진의 얼굴은 쓸쓸함을 증폭시켰다. 당신, 그러니까 서른두 살의 박미희는 과거의 어느 날로 기억을 되감고 있었다. 희진처럼 밝게 빛나는 얼굴로 살아가던 그때 그 시절로.

 중학교 때였다. 아빠는 해외 출장을 떠났다. 하나뿐인 오빠를 데리고서였다. 그때 엄마는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니까. 엄마의 빈자리는 컸지만, 그래도 좋은 아빠가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런데 그날, 아빠와 오빠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 뉴스에서 사망자 명단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빠와 오빠의 이름이 하얀색 자막으로 떠올랐고, 당신은 태어나서 가장 큰 소리로 울었다.

 항공기 사고 이후 주어진 건 수억원의 돈이었다. 겨우 중학생이었던 터에 아빠와 오빠의 죽음이 돈으로 환산되는 현실은 잔혹했다. 보상금이 나온 직후 엄마가 돌아왔지만 사춘기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우울이 일상을 집어삼켰다.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뒤로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자꾸만 우울감으로 번졌다. 이후 회계사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는 남편의 가난한 출신 배경을 문제 삼았다. 결국 엄마는 재력가 집안의 아들을 몰래 소개했다. 이 사실을 안 남편이 간통죄로 고소했고, 결국 당신은 이혼했다.

 이혼한 뒤 맨 처음 한 일은 개명 신청이었다. 어떻게든 불운한 생을 지우고 싶었으니까. 박미희라는 새 이름을 얻었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삶이 통째로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생을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순 없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5년 만에 희진의 신분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신분증을 다시 보니 5년 전 희진은 서울의 한 여대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있었다. 당신도 고등학교 때까진 음악가를 꿈꿨다. 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영문학을 택했다. 미국 유학을 한 경험을 발판 삼아 프리랜서 번역가로 살았지만 성과는 변변치 못했다.

 하지만 희진은…. 당신에게 없는 걸 죄다 갖춘 여자였다. 이후 희진의 삶을 좇기 시작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뒤지고, e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 알아냈다. 주민등록번호 등을 조합하니 비밀번호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모든 일이 너무도 자연스레 흘러갔다. 마치 운명처럼.

 차근차근 희진의 삶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희진은 미국 유학을 떠나 있었다. 희진과 그의 아빠가 주고받은 e메일 수십 통도 있었다. ‘나도 이런 아빠가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희진의 삶을 훔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을 지우고 아예 희진이 되기로 결심했다. 희진의 주민번호로 주민등록등본과 성적·졸업증명서 같은 각종 증명서를 뗐다. 그래야만 희진이 될 것 같았다. 희진의 운전면허증을 들고 도로교통공단에 가서 면허증도 새로 만들었다. 다른 얼굴은 성형수술을 했다고 둘러댔다.

 당신은 그렇게 희진이 됐다. 두려움은 없었다. 새로 받은 운전면허증을 들고 가 희진의 이름으로 은행 체크카드 2장을 만들고 휴대전화도 개통했다. 제2금융권에서 600만원 대출도 받았다. 딱히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아빠와 오빠의 사망 보상금으로 시가 10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구입했을 정도로 물질적으론 풍족한 편이니까.

 불행한 삶을 모두 지우고 희진으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대출을 받은 게 발목을 잡았다. 대출통지서가 집으로 날아간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희진의 엄마가 통지서를 확인하고 지난해 11월 경찰에 신고했다.

 연극은 여기까지였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도로교통공단 등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당신의 모습과 지문을 추적했다. 지난해 12월 중순 강서구 자택에서 체포됐다. 서울남부지검은 횡령·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같은 달 31일 구속 기소했다. 검경 조사에서 당신은 울면서 말했다. “희진이가 너무 부러웠어요. 희진의 삶이 너무도 행복해 보여서….” 배 속에서 4개월 된 태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채승기 기자

◆사건:텔링=특정 사건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보는 기사입니다. 범인·형사·목격자·제보자 등 주요 인물들의 시점에서 소설 형식으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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