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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 110명 구한 홍도 어민 … 학교폭력 해법 찾는 학부모들 … 이들이 바로 '시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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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9월 30일 오전 9시14분, 전남 신안군 홍도 선착장에 사이렌이 울렸다. “유람선이 좌초했다”는 방송이 나온 지 5분여 만에 주민 180여 명이 부둣가에 모였다. 소형보트·유람선·어선에 나눠 탄 주민들은 암초에 부딪힌 유람선에서 110명 전원을 구조했다. 해경 함정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1985년 인근 해역에서 유람선 침몰 사고가 발생해 30명이 희생되자 주민들은 해경과 구조 매뉴얼을 만들어 매년 훈련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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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이 주인의식을 갖고 공동체를 지키겠다고 나서면 국가가 개입하기 전에도 성과를 낼 수 있음을 홍도 주민들은 몸소 보여줬다. 하지만 정부가 주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독점하는 국가 주도 시스템에선 이런 가능성은 드물다. 전문가들은 국가 주도 시스템으론 현대사회의 현안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정책 추진이나 밀양 송전탑 갈등 해결 과정이 그 사례다. 박재창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4대 강은 전문가 판단에 따라 추진됐고 엄청난 돈이 투입됐지만 원하는 성과가 나왔느냐”며 “정책 방향이 시민의 요구와 맞지 않으면 사회가 치르는 비용은 오히려 늘어난다”고 말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도 “밀양 송전탑 논란 때 정부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지 못했다”며 “해결책도 경제적 보상이나 공권력 투입이 고작이었다”고 꼬집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도 위기 앞에선 무력했다. 박 교수는 “세계화 이후 국가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난관을 극복할 주체는 ‘시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때 시민은 단순히 도시에 살며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동료 시민과 평등하게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는 시민, 법을 지키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을 가리킨다. 이런 시민이 활성화되면 전혀 다른 의사 결정이 가능해진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영국에선 핵발전소 문제가 불거진다면 직장인들도 생태·핵 관련 단체를 찾아 일주일씩 토론회에 참여하며 이 기간은 유급휴가로 처리된다”고 소개했다. 시민들은 토론 과정에서 핵발전소를 없애면 풍력발전을 할 건지 등 대안도 논의한다. 정부는 시민 참여의 장을 열어둔 채 정부 차원의 대안을 내놓고 소통한다. 송 교수는 “한국에선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가 ‘국가개조’ 방안을 발표하고 끝났다”며 “시민이 참여하는 과정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런 과정 없인 실질적인 해법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시민·주민단체는 시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역 현안에 대한 참여나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기부보다 정부 비판에만 시민단체의 활동이 치우쳤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동호회에 많이 가고 카드도 열 개씩 갖고 있지만 시민단체 회원으로 활동하는 이는 많지 않다”고 우려했다.

 갈등 해소의 주체가 될 시민의 덕목엔 책임감과 주인의식 같은 윤리도 포함된다. 이동수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는 “주인의식을 가진 시민은 본분에 충실하고 공동체의 결정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존중한다”고 말했다. 이범웅 공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시민들의 공감 능력은 사회에서 접착제 역할을 한다”며 “통일·다문화 사회엔 특히 이런 자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청년 실업이나 의료관광 허용 문제만 봐도 국가를 넘어 지구촌 전체를 보는 세계시민이어야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서구에선 긴 역사를 거쳐 시민이 성장했으나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다. 시민교육이 시급한 이유다. 송 교수는 “우리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건 남보다 앞서라는 의미를 담는다”며 “프랑스 보육원에선 자전거 5대를 20명이 나눠 타는 방법을 깨우치게 한다”고 전했다.

천인성·윤석만·김기환 기자

자립공동체 돕는 박정일씨
참여하고
 꼬치집 열어 일자리 만든 부산 달동네

자립공동체 돕는 박정일씨

부산의 달동네인 산복도로 마을에는 ‘품 마켓’이 있다. ‘어깨 안마 30분에 1000품’ ‘집수리 삽질 1시간에 3000품’ 식으로 정해놓고 주민들이 품을 맞바꾼다. 서로 도와가며 살도록 하려는 아이디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행복한 마을을 가꾸는 데 참여케 한다는 의미도 있다.

 발상은 지난해 창설된 공동체 ‘공유를 위한 창조’가 했다. 시민활동가 변강훈(56)씨, 프랜차이즈 업체 대표인 박정일(39)씨, 김동호(47) 부산마을만들기 지원센터장 등이 산복도로 마을을 ‘행복 동네’로 꾸며보자며 공동체를 만들었다. 국립대 교수였던 김 센터장은 “현장 참여를 통해 달동네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지난달엔 산복도로 마을 입구에 ‘동네 일등 꼬치집’을 냈다. 마을 할머니들이 어묵과 요리를 만들어 파는 집이다. 할머니들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생각이었다. 꼬치집 메뉴 선정과 운영은 프랜차이즈 성공 경험이 있는 박정일씨가 이끌었다.

 지난 한 달 500여만원의 매출을 올려 10% 정도 이익을 냈다. 이익은 2호점, 3호점용으로 쌓는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이 끊기면 무너지는 여느 마을 기업과 달리 자립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목표다.

 박정일씨는 “노하우를 가진 전문가들이 참여해 이끌고 여기에 주민들이 동참해 달동네를 바꾸는 모델을 성공시켜 전파해 보겠다”고 말했다.

부산=김상진 기자

아파트 비리 척결 송주열씨
책임지며
 7년째 아파트 관리비 감시카페 운영

아파트 비리 척결 송주열씨

아파트 비리척결 운동본부 대표 송주열(52)씨는 배우 김부선씨가 ‘난방 투사’로 나서기 8년 전부터 아파트 관리비 문제를 제기해왔다. 스크린골프 설치업체를 운영하는 그가 아파트 문제에 눈을 뜬 것은 2006년 5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 현관 처마가 무너지면서다.

당시 송씨는 “준공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부실시공이니 건설사와 소송을 해야 한다”고 입주자대표회의에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씨에게 돌아온 답은 “아파트 값이 떨어지니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송씨가 2007년 3월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하자 온갖 질문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역시 관리비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해 동문서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련 판결문들을 구해 읽었고 관리소장 등 실무자들에게 궁금한 점들을 꼬치꼬치 물으며 공부했다. 이후 송씨는 관리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전화와 e메일로 상담을 해주고 있다.

 “작은 비리라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했다가 결국 고지서를 받는 사람은 입주민들입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 일이란 자세로 나서야 합니다.”

 지난해 겨울 송씨를 찾아온 70대 부부는 1년 동안 송씨의 조언에 따라 관리사무소 영수증을 한 장 한 장 검토했다. 이렇게 모은 자료로 고질적인 관리비 문제를 개선할 수 있었다. 송씨는 “관리비 문제는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며 “주민들이 책임지고 고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안효성 기자

학가협 활동하는 조순옥씨
올바르게
학교폭력 당한 학생 치유기관도 열어

학가협 활동하는 조순옥씨

2012년 2월 조순옥(53)씨는 고등학생 아들이 길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갔다. 아들의 몸은 멍 투성이였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상습적으로 아들을 구타해 왔다는 것이었다. 학교와 경찰서, 어느 기관도 조씨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조씨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학가협)’를 찾아갔다. 2000년 성수여중 학교폭력 사건 피해자 어머니 조정실 회장이 만든 모임이었다. 조순옥씨는 이 모임에서 마음을 위로받고 정보도 제공받았다.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공공기관의 문제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학가협 회원들의 모습에 공감을 하게 됐어요. 저도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했죠.”(조씨)

 학가협은 학교폭력자치위원회 재심을 학교가 아닌 지자체에서 맡도록 제도 개선을 이끌어 냈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관을 교육감 지정 병원에서 전 의료기관으로 확대시켰다. 조씨는 “피해자의 입장에 서봐야 비로소 보이는 문제점이 있다”며 “많은 사례를 접하면서 학교폭력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학가협은 지난해 7월 대전의 한 폐교를 사들여 피해 학생들을 위한 기숙형 종합치유기관 ‘해맑음센터’를 열었다. 조씨는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서준 기자

파크리오 아파트 박경원씨
글로벌로
벼룩시장 수익금, 탄자니아에 우물 기부

파크리오 아파트 박경원씨

서울 송파구 파크리오 아파트 주민 박경원(32)씨는 여덟 살배기 딸과 세 살배기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박씨는 2011년 8월 ‘파크리오맘(팍맘)’에 가입했다. 팍맘은 파크리오에 사는 엄마들의 인터넷 카페. 처음에는 아파트 주변 정보를 얻을 요량이었다. 박씨는 “1년 정도 지나니 팍맘에서 하는 다양한 기부활동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팍맘은 2009년부터 ‘아이’와 관련된 각종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카페를 만든 임유화(38)씨의 제안으로 국내 아동들을 돕고 있다. 해외로도 눈을 돌린 건 2010년부터다. 팍맘들이 “우리 아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갈 다른 나라 아이들의 아픔도 보듬어 주자”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팍맘들은 지금까지 탄자니아 등에 우물 8개를 팠다.

 우물 파기 등 기부에 쓰이는 돈은 팍맘들의 생활 속 참여를 통해 만든다. 필요 없는 물품을 벼룩시장에 올리고 그 판매 수익금을 ‘기부통장’에 입금한다. 지난 8월에는 산지 농민과 함께 배도라지즙 공동구매 이벤트를 해 기부금 10만원을 모으기도 했다.

 팍맘은 해외에 학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박씨가 “아이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최고의 기부”라며 아이디어를 냈다. “대학생 때는 인도로 봉사활동을 하러 간 적도 있어요. 글로벌 시대를 맞아 ‘엄마의 마음’이 꼭 국내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효성 기자

사진=신인섭·김상선·송봉근·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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