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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일 평화헌법 9조를 노벨평화상에 추천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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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부영
한일협정재협상
국민행동 대표·전 국회의원

지난 18일 서울 외신기자클럽에서는 이례적인 내외신 기자회견이 있었다. 전직 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들이 포함된 ‘일본 평화헌법 9조 노벨평화상 추천서명 기자회견’이었다. 여야 정치인 출신은 물론 보수·진보·중도를 대표하는 종교·문화예술·대학·노동·시민사회 원로 50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여야와 보수·진보로 분화돼 갈등을 벌여온 한국에선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서명인들은 노벨평화상 추천운동이 보편적 평화에 대한 한국민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에서는 2004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 9명의 원로지식인이 ‘헌법 9조회’를 구성해 평화헌법 9조를 지키자는 운동을 10년째 벌여왔다. 2013년에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전업주부 다카스 나오미가 아이들이 전쟁에 희생되는 나라로 만들 수 없다며 평화헌법 9조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해 달라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현재까지 40여만 명이 참여했다.

 한·일 두 나라 안에서도 일본 평화헌법과 관련한 중요한 공방이 벌어졌다. 지난 7월 1일 아베 신조 일 총리가 주재하는 내각회의는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른바 ‘해석개헌’을 통한 평화헌법 9조의 무력화를 기도했다. 7월 11일 한국의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 11월 30일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36인, 찬성 235인, 기권 1인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규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베 총리는 11월 18일 중의원 해산을 발표, 12월 14일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장악한 데 이어 앞으로 참의원 선거에서도 3분의 2 의석을 차지해 안보관계 법제의 정비는 물론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없애느냐 존치하느냐는 해방·종전 70주년인 2015년에 세계적인 역사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좁게는 일본과 한반도에, 넓게는 동아시아와 세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면서 핵무기의 출현을 목도했으며 그 교훈이 집약된 것이 평화헌법 9조였다. 9조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은 그 교훈이 헛되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 평화헌법을 없애겠다고 공언하는 아베 총리 세력은 도쿄 군사재판에서 단죄된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노-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인정했던 범죄마저 그 흔적을 지워버리기 위해 날조에 나서고 있다.

 아베의 일본은 미국과 중국의 가파른 대결에서 힘겨워하는 미국 편을 들어 전략적 균형추를 미·일 쪽으로 기울도록 노력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미·일 편에 실려 온 한국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에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뿐 아니라 지난 60여 년 동안 평화헌법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와 평화, 경제 번영을 누린 일본 국민도 아베의 군사주의 노선을 반대하고 있다. 아베 노선에 반대하고 있는 인사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지난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무라야마·하토야마 전 총리와 노나카 히로무 전 자민당 간사장, 오자와 이치로 ‘생활의 당’ 대표 등 정치인들과 후지야마 신고 평화포럼 대표 등 시민운동 대표들을 만나봤다. 이들 대다수는 아베 총리 등 일본의 극우세력이 중국과 한국이 세계의 주요 국가로 부상하는 것에 초조해하고 있으며 북한의 핵 보유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데 동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지난날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전 이후 평화헌법 체제 아래서 거둔 일본의 성취를 긍정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여러 인사가 평화헌법 9조에 대한 노벨평화상 수상운동이 일본 안에선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국민이 자기 나라 헌법에 노벨평화상을 달라는 것에 명분이 부족하다는 뜻인 듯했다. 일본 평화헌법이 일본과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에도 중요하니까 한국에서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운동을 벌이면 어떻겠는가라는 필자의 제의에 대해 대다수 면담 인사가 “고맙다”고까지 하며 환영했다. 한국에서도 원로 50명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을 칭찬하거나 그에 따른 성과를 일본에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행동에 옮기는 데 큰 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아베의 군비 확장 노선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큰 격동을 겪지 않으면서도 명분 있는 저지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헌법 9조의 개폐 여부는 아베의 군사노선이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사적인 논쟁거리다. 아베의 군사노선을 저지할 수 있는 유효한 방안을 강구한다는 측면에서도 깊은 고민이 있어야겠다. 평화헌법 9조의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운동이 한국에서 시작해 유럽·미국 등 세계로 번져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옛말에 원수를 은혜로 갚는 일만큼 큰 덕(德)은 없다고 했다.

이부영 한일협정재협상 국민행동 대표·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