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교 나의 스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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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폴·베이커」교수. 미국 텍사스 트리니티대학원 연극과에서 연극철학과 연출론을 가르쳤던 그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몇 안되는 동양인중의 하나였던 내가 강의시간중 의견을 발표하면 그는 『미스터유의 말이 옳다. 학생 여러분, 미스터유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보고 계속하자』면서 내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무대조명과 의상·장치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졸업공연 작품의 연출을 맡겨 연출가로서의 재질을 인정받게 해준것도 역시 그분이었다.
내가 특히 「베이커」교수를 잊지못하는 이유는 그분의 행적이 내 진로의 좌표처럼 됐기 때문이다.
「베이커」 교수는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원 연극과를 졸업했다. 그는 다른 예일출신의 예술가들처럼 뉴욕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무대로 진출하기를 거부하고 그의 고향 텍사스로 돌아가 당시 석유와 돈만 있는 텍사스에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개척자였다 그가 텍사스에 세운 극장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실험연극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되고있는 댈라스 연극쎈터다.
만일 그가 동부지역에서 연극연출가로 활약했다면 그는 분명히 명성을 낱리는 연출가가 됐을것이다.
그분의 추천으로 역시 예일대학원 연극과를 다녔던 내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생각을 갖게 해준 것도 바로 그분의 이런 행적이 준 영향력이다.
오늘날 새삼 「베이커」교수가 기억되는 이유는 요즈음 많은 해외 유학생이 수업을 마치고도 고국에 돌아오기를 주저하고 있으며 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활동하는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미 고향을 잊어버리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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