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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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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파리 지하철 3호선 파르망티에 역에는 반바지에 분 바른 가발을 쓴 말끔한 대리석 신사가 서 있다. 왼손엔 감자 바구니를, 오른손엔 감자를 쥐고 있다. 프랑스에서 '감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 상(像)이다.

약사이자 농학자인 파르망티에는 7년 전쟁(1756~63년) 중 프로이센의 포로가 돼 감자만으로 연명했다. 전쟁이 끝나자 감자 덕에 살았다며 그 후 40여 년간 감자 연구에 매달렸다. 그의 진가는 나폴레옹 시절 드러났다. 나폴레옹은 강한 군사력은 식량 자급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파르망티에는 감자를 해법으로 제시했고, 10년 새 프랑스 감자 생산량을 15배나 늘려놓았다.

루이 16세에게 감자꽃을 단추에 달도록 권유한 것도 그였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겐 감자꽃의 아름다움을 설파해 당시 프랑스 왕실의 패션코드를 감자꽃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감자에 대한 편견을 몰아낸 것도 그의 공이다.

생김새 탓인지 감자는 16세기 중엽 유럽에 소개된 이래 200여 년간 찬밥신세였다. '악마의 산물''최음제''만병의 원인' 등의 누명도 썼다. 이런 누명이 벗겨진 것은 1750년 간행된 '식물지'에서다. 저자인 영국 의사 존 힐은 "감자에 독(毒)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누명은 벗었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19세기 초 조지 기싱은 그의 소설 '지옥'에서 감자를 '천한 음식'으로 묘사했다. 영국의 의회법 학자인 리처드 코브던은 "감자를 먹는 사람은 어떤 직업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가 하면 일찌감치 감자의 가치에 주목한 학자들도 있다. 1664년 존 포스터는 당시 왕이던 찰스 2세에게 "감자가 식량난 해결의 확실한 열쇠"라며 "영국과 웨일스에 대량 재배하면 경제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맬서스 역시 '인구론'에서 감자가 기근을 해결할 유용한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국제구호개발기구인 월드비전이 '사랑의 감자꽃 피우기' 캠페인에 나섰다. 모금한 돈으로 북한의 씨감자 생산을 늘려 식량난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가난 구제는 임금도 못한다지만 감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온갖 시련을 딛고 가난한 자의 주린 배를 채워줬던 '전례'가 있지 않은가.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