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빼가고 에인절투자는 끊겨 … 성장판 닫힌 한국 벤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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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대학생 때 외환위기를 맞았던 서영석(40) 벤처커넥팅 대표는 1999년 벤처 창업에 뛰어들었다. 김대중 정부가 펼친 벤처 육성정책 덕에 쉽게 자금도 구할 수 있었다. 전화 벨소리를 인터넷 웹상에서 골라 휴대전화에 전송하는 기술을 개발해 4년 뒤 한 상장사에 팔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봄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그에겐 암흑기가 닥쳤다. 거품 붕괴 트라우마에 정부는 벤처 창업에 이중 삼중 규제를 가했다. 벤처업계는 닷컴 붕괴 이후 10여 년을 ‘빙하기’라고 부른다. 노무현 정부 시절 ‘생명’,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색’ 경제란 모토를 내걸고 벤처 육성정책을 폈지만 닫혀 버린 벤처생태계 성장판은 좀처럼 다시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5월 박근혜 정부도 ‘창조경제’를 내걸고 벤처생태계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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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최근 벤처 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창업하기 좋아졌다”고 느낄 만큼 벤처생태계가 ‘상당히 복원됐다’는 응답은 35%에 그쳤다. ‘조금 복원됐다’는 응답이 40%에 이르긴 했지만 25%는 ‘변화가 없다’거나‘오히려 나빠졌다’고 했다.

 우선 입구부터 꽉 막혀 있다.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가 종잣돈을 마련하는 데는 에인절투자가 가장 효율적이다. 에인절투자는 신생 벤처기업에 자본을 대주고 3~5년 후 벤처캐피털 같은 전문투자자에게 비상장 주식을 팔아 자금을 회수하는 개인투자자들이다. 그러나 벤처 빙하기 동안 에인절투자자는 10분의 1로 줄었다. 2000년 5만~6만 명에 달하던 게 지금은 5000명 남짓에 불과하다. 투자자금도 같은 기간 5493억원에서 3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그 사이 미국에선 에인절투자가 정보기술(IT) 발달에 힘입어 온라인으로 돈을 끌어모으는 ‘크라우드펀딩’ 형태로 진화했다. 국내에서도 관련 법안이 지난해 7월 국회에 상정됐지만 투자자 보호장치를 보완해야 한다는 이유로 낮잠을 자고 있다.

 어렵게 생존한 뒤에는 벤처캐피털 자금을 수혈받아야 하지만 여기도 장벽이 있다. 벤처캐피털이 은행처럼 몸을 사리면서 융자나 다름없는 전환사채(CB)·주식인수권부사채(BW)로 투자하고 있어서다. 이는 이자를 받는 방식이어서 현금이 아쉬운 창업가에겐 족쇄나 다름없다. 일부 벤처캐피털은 이를 빌미로 개인 지분을 요구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한다.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도 치명적이다. 예컨대 2007년 경기도 성남의 소프트웨어 벤처는 숙련된 개발인력이 프로그램 개발 도중 한꺼번에 대기업으로 이직해 사업 자체를 접기도 했다. 이런 피해가 빈발하자 정부가 2011년 8월 ‘중소기업 기술인력 보호·육성방안’을 마련했지만 벤처업계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투자 과실을 회수하거나 사업을 키우기 위한 기업공개(IPO) 단계의 문턱도 높다. 벤처업계로선 2005년 코스닥과 거래소시장의 통합이 결정타였다. 이때부터 벤처기업도 까다로운 규제를 받게 되면서 코스닥 상장까지 걸리는 시간이 과거 코스닥 시절 평균 7년에서 현재 14년으로 늘었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은 “코스닥을 거래소와 합병한 것은 국내 벤처·창업생태계에는 재앙이었다”고 지적했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술주의 특성을 살리려면 코스닥의 특성을 살리는 쪽으로 상장이나 공시요건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안으로 지난해 7월 코넥스를 출범시켰지만 벤처 활성화와는 거리가 멀다. 개인투자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벤처캐피털과 3억원 이상 예탁증거금을 가진 개인에게만 투자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거래대금도 수억원에 그친다. 김군호 코넥스협회장은 “이러다간 국내 벤처기업이 외국 증시에 상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국내에는 통합 전 코스닥처럼 활발하게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벤처기업 투자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IPO까지 갈 확률은 0.1%에 그친다”며 “투자자금 회수가 보장되지 않는데 누가 위험한 시장에 투자하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김동호 선임기자, 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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