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회고록 국내중점연재 「신의를 지키며」…<30>인권외교(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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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당초 우리는 인권을 너무 좁게만 정의하려 했었다. 인권이란 그저 정치범들에 대한 불법적 약식재판이나 구금행위 등을 줄이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인권현장에 규정돼있듯이 민주주의 원칙을 진작하고 가족의 자유로운 이주와 재결합을 허용하며 인종·종교·성·민족적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이 모두 인권이란 말속에 함축돼 있었다.
헬싱키협정에 서명한 미국으로서는 그 인권규정을 위배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국무장관을 불러 그 동안의 협정 이행실적을 평가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미국인들에게 쿠바·북한·베트남·캄보디아 등지에의 여행을 금지시키고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잘 이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77년 3월 1일 나는 이러한 제한들도 철폐했다.
77년 1월 21일 「밴스」국무장관은 그의 첫 기자회견을 가진 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람들이 인권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갖고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놀랐습니다. 우리가 국제인권문제에 관해 솔직이 밝히겠다고 천명한 만큼 앞으로 왜 어떤 것은 비판하고 어떤 경우엔 언급하지 않는가에 대해 계속 질문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는 그 당시도 매우 어려웠지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1백 50개 국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기준만으로 갖가지 문제들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외관계에 있어 상대국 정부가 그들의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했다.
하나의 일반론을 관료정치의 행동원칙으로 삼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백악관이나 국무성의 고위참모들 가운데 인권신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책이 과연 완벽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문제로 언론의 계속적인 비판과 국민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또 남아공·아르헨티나·칠레·소련 등 몇몇 나라들이 인권실태공개를 거부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긴장될 때마다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우리 외교관들의 불만에 부닥쳤다.
이러한 비판이나 불평과 함께 우리의 정책이 순진하고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도 점차 커갔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선 옛 해군시절의 장관이던 「하이먼·리코버」제독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충고해 주었다.
-「리코버」는 내가 인권문제에 대한 원칙을 고수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갈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80년의 선거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기 1977년4월 18일>
나의 중요한 목표가운데 하나였던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꾀해나가는 과정에서도 나는 소련의 인권탄압은 덮어두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은 나의 취임당시 보내온 첫 번째 서한에서 『상대방의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의 말을 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귀절을 미소양국사이뿐 아니라 모든 국가들간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명제로 해석했다.
소련대사 「아나톨리·도브리닌」과 이 문제를 논의할 때도 나는 소련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인권문제를 포함해 모든 기존의 합의사항들이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밝혔다.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은 43년 모든 국가들에 의해 승인됐으며 바로 얼마 전 소련은 미국과 같이 헬싱키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인권문제를 우리 두 나라 사이의 본격적인 토의사항으로 묶어놓은 셈이다. 「도브리닌」은 가벼운 미소를 띠면서 두 나라가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과는 달리 소련에서는 실업자도, 여성차별도 없다고 주장했다.
77년 2월 중순 소련의 유명한 반체재과학자 「안드레이·사하로프」가 내게 소련관리들에 의해 억류돼있는 상황을 알려왔을 때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에서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그가 내 서명이 든 편지를 들고 찍은 사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브레즈네프」의 어조는 2월 25일 보내온 두 번째 서한에서 거칠게 변했다. 그는 7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논의된 것보다 훨씬 대폭적인 핵무기삭감을 주장하는 나의 제안을 거부했으며 우리의 인권정책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특히 소련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을 소련의 적임을 선언한 배신자」로 여겨지고 있는 「사하로프」에게 내가 서한을 띄운 일에 격분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이런 일로 해서 종종 국내외로부터 외국지도자들을 화나게 하고 국제관계를 긴장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구금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기본권을 빼앗긴 사람들로부터는 결코 비판받지 않았다. 그들은 공개적인 성명이나 은밀히 보내온 서신에서 나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되거나 잊혀지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임을 반복해서 강조 했다.
-우리는 소련과 수감자교환을 위한 협상을 매듭지었다. 나는 이 협상결과 소련으로부터「긴즈버그」와 「빈스」,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의 석방을 얻어낸 것은 매우 훌륭한 거래였다고 생각한다. <주=이들은 반체제저술가 「알렉산드르·긴즈버그」(42) 소련침례교지도자,「게오르기·빈스」(50)부부 및 다섯 자녀, 우크라이나 민족운동가이며 역사학자인 「발렌틴·모로즈」(43), 그리고 이스라엘로 가기 위해 7o년 레닌그라드에서 스웨덴으로 가는 여객기를 납치하려다 체포된 유대인 「에두아르드·사무일로비치·쿠즈네초프」(40)와 「마르크·디나시츠」(52)다> 소련 측은 또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스파이 한 사람을 처형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우리는 지난해 유죄판결을 받은 2명의 소련스파이들을 감형해 주었다. <일기 1979년 4월 26일>
수감자교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소련에 갇혀있던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감격적인 체험이었다. 그것은 내가 대통령이 된 이후 사용했던 인도적 정책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5명의 수감자들은 독감방에서 새벽 4시에 깨워졌다. 그들은 그들의 소련시민권이 취소됐으며 소련을 떠나야한다는 사실을 통고 받았다.
그들은 교환내용에 관한 짧은 설명과 함께 그들의 가족이 처벌받지 않고 곧 그들과 합류하리라는 것을 통보 받고 나서 감시원들과 함께 소련국영항공기에 탑승했다.
소위 「국내망명」생활을 해온 것으로 돼있던 「빈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머리를 빡빡 깎은 상태였다.
비행기가 뉴욕공항에 도착했을 때 소련관리들이 램프를 2개나 요구해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들은 5명의 석방자들이 한쪽 램프로 걸어 내려오는 동시에 미국에서 풀어준 소련인들이 다른 램프로 비행기에 올라타도록 하자고 요구했다. 한 램프를 이용해 동시에 오르내리도록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온 반체제인사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갖지 못했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도록 해주었다.
「빈스」는 비록 가족들과의 재결합이 약속돼 있었는데도 소련을 떠나온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나 미국의 침례교신도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를 따뜻이 감싸주리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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