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회고록 국내중점연재 「신의를 지키며」…<28>캠프데이비드 그 후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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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 먼저 가있던 「보브·리프슈츠」보좌관이 「바이츠만」이스라엘 국방상의 전갈을 보내주었다.
만약 이집트 쪽에서 이스라엘 내각이 승인한 조약초안을 받아들였다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바이츠만」은 이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평화 그 자체』라면서 이스라엘 사람이 구원의 적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설명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면초가라는 어휘가 이스라엘의 그런 감정을 보다 적절히 표현 한 것 같다. 「사다트」가 말썽 많은 조약초안을 승인했기 때문에 나의 전용기가 텔아비브공항에 가까와지면서 나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나는 「베긴」수상, 「이츠하크·나본」이스라엘 대통령과 함께 승용차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나본」은 쾌활한 분이었으며 온건하고 이지적이고 친근감을 주었다. 그는 많은 이민족·종교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화평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베긴」과 「나본」은 「테디·콜렉」시장이 시외곽에 마련한 나를 위한 환영식에 참석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은 이 지역에 성난 시위군중들이 몰려있어 자칫 달걀세례를 받게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로 일부 시위군중이 격노하긴 했으나 달걀은 던지지 않았다.
피킷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영어로 가장 눈에 뛴 것은 『환영! 「빌리」의 형』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새삼 깨달았다.
우리부부는 바로 수상관저로 초대되어 매우 훌륭한 만찬을 대접받았다. 나는 세 사람의 지도자들이 캠프데이비드를 떠난 이래 처음으로 평화조약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나는 「베긴」에게 서재로 들어가 현안문제를 토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선 「사다트」와의 면담결과를 알려주고 미국이 마련한 조약초안을 수락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사다트」와의 대화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나는 「사다트」가 「베긴」이 카이로 중심가까지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사다트」자신은 조약체결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할 의향을 갖고있다고 전했다. 나의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베긴」은 비로소 처음으로 어떤 협정에도 서명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협정초안을 이스라엘 각의와 의회에 넘겨 자치(팔레스타인인들의 요르단강서안과 가자지구에서의 자치)의 개념, 동 예루살렘관계 등 모든 문제를 토의에 붙여야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연후에만이 서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아무래도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야겠다고 말했다. 「베긴」도 일어나 한 발짝 거리에까지 다가와 내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일기 l979년 3월 10일>
그날 밤 처럼 좌절해 본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즉시 「밴스」와 다른 보좌관들을 내방으로 불러 심야전략회의를 가졌다. 남은 한가지 희망은 다음날 열리는 이스라엘 각의에 내가 이 문제를 직접 설명하는 길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튿날 나는 한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선교하는 동안 나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이스라엘 내각에 평화의 폭넓은 이익과 실패의 결과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각의가 열리자 「베긴」수상은 나에게 회의를 주재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저기서 투덜대고 훼방을 놓는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끝냈다. 나는 국무위원 개개인에게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질문 하나 하나마다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월요일 아침 나는 다시 이스라엘 각의에 참석해 「베긴」 및 16명의 국무위원들과 협의를 가졌다. 그들은 시나이반도반환 후에 이집트가 석유를 이스라엘에 공급해 줄 것인가를 우려했고 이집트인들이 가자지구에 자유롭게 통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문제에도 쉽게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각의 참석 후 우리는 크네세트(이스라엘의회)로 직행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베긴」수상과 「시몬·페레스」노동당당수가 연설하는 동안 나는 「밴스」장관에게 쪽지를 보내 하오의 이스라엘 각의에 참석해 석유의 안정적 공급과 가자지구에로의 이집트인 자유통행문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토의하도록 지시했다.
- 나는 「베긴」을 전화로 불러 내일 조찬을 함께 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 카이로로 전화를 걸어 「사다트」에게 이스라엘에서의 협상실패를 논의하자며 카이로공항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일기 1979년 3월 12일>
우리는 「베긴」이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실질적인 진전을 이룩했으며 단지 몇 개의 문제만이 미해결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다얀」외상이 「밴스」에게 전화를 걸어 「바이츠만」국방상과 몇몇 장관들이 모여 희미해져 가는 평화노력을 소생시키기 위해 협의를 가졌노라고 알려왔다. 장관들은 다수가 미국 안에 만족하고 있으나 「베긴」이 여전히 이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베긴」과 나는 조찬에 앞서 창가에 서서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중동을 떠나기 전에 평화조약문제의 타결을 희망한다고 「베긴」에게 말했다. 그리고 미국초안이 이집트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결국 「베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적인 정치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동의하고 요르단강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해진 몇 가지 활동제약을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숙소인 킹 데이비드 호텔을 떠나면서 로비에서 나는 「베긴」에게 가자지구에 대한 초안을 삭제하면 미국 안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다. 「베긴」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드디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린 것이다. 나는 카이로에 가서 「사다트」에게 말할 요점들을 「베긴」에게 이야기 해줬다.
카이로공항에 도착해 우리는 「사다트」대통령, 「무바라크」부통령, 「할릴」수상을 만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서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합의사항들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사다트」에게 지체없이 이 안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했다. 이스라엘에서 바뀌어진 내용들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다트」는 몇몇 보좌관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가로막고 『그 안에 만족합니다』고 대답했다. 모든 것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사교환, 석유공급제의 등을 이스라엘 측에 빨리 하라고 권고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기쁜 성공의 소식을 각계각층에 알리도록 지시했다. 하원의장 「립·오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각하, 각하는 이제 집사가 아니라 교황이십니다』(「카터」는 침례교 집사임·주) 「사다트」와 「베긴」은 다시 워싱턴을 방문해 3월 26일(79년) 백악관에서 거행된 조인식에서 역사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그날 저녁 평화조약서명 기념연회에서 70년 수에즈운하근처에서 이집트의 총탄에 머리를 맞아 부상했던 「바이츠만」국방상의 아들이 「사다트」의 품에 안기는 극적인 장면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베긴」은 그로부터 6일 후인 4월 2일 카이로를 방문했다. 『이집트국민들이 본인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베긴」이 전화로 나에게 외친 말이었다. <다음 회부터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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