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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가 '밥' 먹여주는 한국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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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자동차 영업사원인 A는 집에 분유 값이 떨어져도 친구 B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의리 때문이란다. 시간강사인 B는 친구 C의 외도를 알면서도 자신의 후배인 C의 아내에게 철저히 비밀을 지킨다. 의리 때문이란다. 대기업 과장인 C는 부장인 D가 저지른 업무상 실수를 대신 뒤집어쓴다. 역시 의리 때문이란다.

과연 의리는 위대했다. B는 돈이 생기자마자 A의 고객이 되었다. B가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때 C는 당연히 비밀을 지켜주었다. 하마터면 출세에 태클이 걸릴 뻔한 D부장 역시 의리있게 C과장의 앞날에 레드 카펫을 깔아 주었다.

이 아름답고 정교한 의리의 네트워크에서,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모두 뭔가를 주고받았다. 피해자는 네트워크 밖에 존재한다. A가 의리를 지키는 동안 그의 아내는 친정에 손을 벌렸고, B가 비밀을 지키는 동안 친구 아내는 남편과 선배 모두에게 배신당했다. C와 D가 룸살롱에서 3차를 하고 사우나에서 막차를 하며 알몸으로 도원결의를 맺을 때, 당연히 초대받지 못했던 여자 과장은 자기보다 못한 C의 승진을 눈만 끔뻑이며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의리'라는 말에 부르르 떨며, 냉소를 퍼부으며, 자신들의 비극을 하소연한다.

전설에 의하면, 한때는 의리가 지고한 도덕률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무사들은 검을 빼드는 순간에도 발밑의 벌레를 밟아 죽일까 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도덕률은 지금, 동네 만화가게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무협지에만 존재한다. 강호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의리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칙을 듣기 좋게 포장한 것이며 정의와는 별로 상관없다. 그러니 자동차 영업사원과 시간강사와 대기업 과장에게 죄책감을 묻는 것은, 호랑이에게 지금 네가 산 채로 씹고 있는 토끼가 불쌍하지 않으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아둔한 일이다. 의리에 모럴을 따지는 건 언제나 피해자의 몫이다. 너. 희. 가. 어. 떻. 게. 나. 한. 테. 이. 럴. 수. 있. 어. 지겹지 않은가? 언제나 독백으로 끝나는 이 패배자들의 진부한 대사가.

여자의 복수극을 그린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백 선생은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금자씨는 복수를 결심했다. 친절한 금자씨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감방 동료들에게 의리를 지켰고, 그들은 금자씨가 복수할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금자씨의 의리 역시 고도로 계산된 투자였다. 의리를 지키지 않은 백 선생도 나쁘지만 의리를 복수에 이용한 금자씨 역시 그다지 숭고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투덜댄다면 금자씨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나 잘하세요."

노은희 영화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