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떡값 의혹' 실명 공개는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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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18일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됐던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파문이 일고 있다. 노 의원은 국회 상임위 질의 과정에서 검사들의 이름을 밝히고 발언을 전후해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에도 검사들의 실명을 적시했다. 게다가 자신의 홈페이지에도 실명이 적힌 보도자료를 올렸다.

노 의원의 실명 공개 이후 언론에서도 '떡값' 검사 명단을 실명으로 보도하고 있으며, 당사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된 법무부 차관은 "억울하다"는 호소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나머지 전.현직 검사들은 모두 '떡값' 수수 사실을 부인하면서 결백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실명이 공개된 검사들이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부분은 검찰 수사를 통해 시비가 가려질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진위를 떠나 그 검사들은 이미 '떡값'을 받은 것으로 간주돼 여론에 의한 유죄 판결을 받은 셈이 됐다. 후일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억울한 사정이 밝혀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노 의원의 이번 실명 공개에 대해 옹호론자들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의 범주에 든 행위로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 오히려 "할 일을 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 의원의 이번 행위는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범위를 일탈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상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한해 국회 밖에서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직무 행위 그 자체는 물론 직무와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행위도 포함한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예컨대 국회에서 발언할 내용을 발언 직전 원내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하는 행위도 직무 행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례는 국회에서 한 발언이라도 국회 밖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하거나 출판한 경우에는 면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 의원의 행위 중 불법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시해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판례상 '출판'과 유사한 것으로서 면책특권의 범위를 넘어선 요소로 평가될 소지가 크다. 따라서 노 의원의 이번 공개 행위는 면책특권의 범주가 아닌 범죄 행위로서 검찰의 기소가 가능하다고 본다.

노 의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은 우선 통신비밀보호법이다. 통비법은 '불법 도청에 의하여 알게 된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형법상 명예훼손죄도 성립될 수 있다. 다만 명예훼손죄는 실명이 공개된 전.현직 검사들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노 의원의 이번 행위는 비난 가능성이 크다. 특정인들에 대한 명예훼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법 도청을 통해 취득된 대화 내용은 그 누구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법 원칙의 근간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 의원 본인도 "나를 기소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니, 행위의 불법성에 대한 인식 또한 뚜렷했던 것으로 보인다. 범죄 행위가 성립하고 당사자의 범죄 인식 또한 뚜렷했다면, 수사기관은 당연히 그를 수사해 기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노 의원의 이번 행위가 면책특권의 범주이냐 또는 기소 가능한 것이냐 여부를 떠나 국회의원으로서 그가 보여준 경솔한 태도와 그 심각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국민이 엄중히 정치적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면책특권을 악용해 법을 짓밟는 사례의 재발을 막는 최종적인 책임은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박준선 변호사.대한변협 이사